[민중의소리] “이명박 정부가 나를 슬기롭게 만들었다”

                     인터뷰 -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김이경 사무총장

 

 

“정말 재미없어요.”
남북관계를 주로 다루는 기자와 민간 대북지원 단체 사무총장이 얼굴을 마주 보며 나눈 대화다.

남북관계가 안 풀린 지도 너무 오래됐고 경제협력이나 민간 차원의 교류, 대북지원 등 모든 분야의 활동이 ‘스톱’된 지도 오래됐다. “정부는 전향적으로 나서라”고 외치기도 입에 군내 나도록 했고, 해도 해도 안 되니 자포자기 심정이 들기도 했다.

기자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 재작년 기사도, 작년 기사도, 또 올해 쓰는 남북관계 기사도 “얼어붙은 남북관계” 운운, 크게 달라진 내용이 없으니 “정말 재미없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그러나 이 말이 남북관계나 통일 문제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더 중요해졌다는 게 옳은 표현일 것이다.

김이경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겨레하나) 사무총장을 6일 만났다.

“친정 식구보다 자주 만났었는데...”

51개 민간 대북지원단체가 모인 대북협력민간단체협의회(북민협)를 비롯해 민간지원단체의 숫자는 꽤 많다. 지원 대상, 내용, 방식 등도 다양하다.

영유아 등 취약계층 대상 긴급구호를 주되게 하는 단체부터 공장 짓기 사업 등 중장기 개발협력 방식으로 나아가는 단체 등. 대북지원사업이 10여년 이상 이어지면서 그 내용도 다양해지고 수준도 높아졌다.

그러나 정부의 ‘5.24조치’ 이후 ‘취약계층 대상 인도지원’만 선별적으로 허가가 나면서 이러한 ‘다양성’은 사라지고 과거로 퇴행한 상태다.

 

겨레하나 김이경 사무총장 (사진출처. 민중의소리)


 

“지난 정권에 비하면 엄청나게 달라졌다. 긴급구호 성격에서 공장을 지어준다거나 개발협력으로 가는 추세였는데 이 모든 게 이명박 정권 들어 중단됐고, 밀가루 같은 경우 나가던 것조차 올초부터 완전히 중단됐다. 그러면서 나온 게 북측의 분배계획서를 승인조건으로 내세운 거다. 그걸로 대북지원을 반대하는 보수언론의 목소리나 정권 내부의 사람들을 진정시켰던 듯하다.

그러니까 북에서도 어느 정도 해주다가 갈수록 ‘이런 식의 지원은 해서 뭐하냐, 해도 해도 너무 한다’, 민간도 ‘이런 지원 더 이상 하지 말자’ 이러다가 국방위원장 사망 후 완전히 ‘올스톱’된 거다.

대북지원 단체들이 문도 닫고 위축되고 지원양도 비교 안 되게 줄었다. 우리도 전에 평균 1년에 40억 넘었는데 작년에 몇천만원 수준이었다.”

한창 땐 한 달에 세 번도 만나고 “친정 식구들보다 자주 만났던” 사람들과도 못 만난 지 오래다.

공장사업 등 협력사업이 ‘스톱’된 상황도 마음의 짐이다.

“병원 지어주다 지붕 못 덮어서 물에 젖고 밀가루 빵공장 같은 데는 밀가루 보급이 끊어져 피해가 엄청나고 우리 쪽 사정으로 인한 손실액을 어떻게 숫자로 표현하겠나. 앞으로 공장사업 지속하자고 말하기도 미안한 상황이다. 북측이 부담스러워 하는데 공장 짓는 게 더 좋다고 설득해서 추진했는데 우리가 책임을 못 진 거니까...”

김 총장은 이처럼 민간단체들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와중에도 “후원자들은 줄지 않았다”고 말한다. 다만 반출이 안 되고 있을 뿐. 경색된 남북관계를 답답하게 바라보다가도 힘을 잃지 않는 동력이다.

“사람들이 참 따뜻하다. 폭이 넓진 않아도 꾸준하게 늘 마음을 주시는 분들이 많다.”

“우리가 왜 기죽어야 하냐”

그는 “이명박 정부에 고마운(?) 게 단체들이 단결이 잘 된다”고 말한다.

“단체들 특성상 각자 창구를 유지해야 하고 주된 협력 파트너가 누구냐 등에 따라 매우 다양하다. 다양성이 민간의 특성이기도 하고. 그런 특징 때문에 ‘헤쳐모여’가 잘 안 됐었다.”

‘단결이 잘 된다’는 말은 재작년 무렵부터 북민협 등을 중심으로 정부를 향해 “더 이상 못 참겠다”며 한 목소리를 내왔기 때문이다. 대북지원을 선별적으로 허용하면서 정부가 ‘대북제재의 수단’으로 삼고 있다는 지적이다.

“재작년에 제일 많이 목소리를 냈다. 작년에도 그랬고. 근데 아무리 해도 정부가 요지부동이고, 국회의원을 만나봐도 표 안 되고 ‘퍼주기’ 문제 이런 것들 때문에 못 하고, 단체들도 지치고 자포자기 심정이 됐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지금, 김 총장은 ‘위풍당당’을 외친다. 잘못된 일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위축되고 자포자기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싸워도 안 되니까 포기하는데 그러지 말고 모금도 하고 우리 주장을 하자, 그게 여론사업이고 국민을 설득하는 거다. 우리가 기가 죽을 필요가 뭐가 있냐. 당장 물자를 보낼 수 있든 없든 뭐가 그리 중요하냐. 우리 마음이 중요하다.”

올해 봄가뭄과 큰물, 태풍 등 자연재해가 이어지고 국제곡물가 상승이 예상되는 등 북측 식량난이 심각한 것은 사실이다. 올 가을 곡물 생산량이 60만t 가량 줄어들 것으로 통일부는 추정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단체들이 ‘캠페인’을 통해 범국민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긴급 수해지원의 의미는 크다. 오는 11일 밀가루 500t이 처음으로 북측에 전달된다.

“특히 북민협이 개성을 방문해 수해지원에 합의한 것은 김정일 위원장 사망 이후 처음 만난 거니까 의미가 남다르다.”

그럼에도 그는 대북지원을 해야 하는 이유로 ‘북이 어려우니 도와주자’ 라고만 접근하는 것보다 “우리 주장이 틀리지 않은데 위풍당당 이야기하자”고 접근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실제 정권 내 강경세력의 입장은 북이 어려울수록 더 압박해야 무릎 꿇고 나온다는 것 아닌가. 그들은 현 정부가 ‘지난 정부와 달리 일관성 있는 대북정책을 폈고 성공해왔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나.”

김 총장이 ‘위풍당당’을 외치기까지 마음고생도 많았다. 겪고 또 겪다보니 오히려 중심, 원칙을 단단히 잡게 됐다. “이명박 정부가 나를 슬기롭게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김 총장은 “어떤 식으로든 민간교류를 해야 한다. 공장사업이 좋을지 밀가루가 좋을지 서로 생각도 다양하지만 남북이 민간의 필요성을 찾아가면서 자꾸 만나면서 통일의 주체역량이 강화되고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거다”라고 말한다.

대북지원사업이 성장하면서 장기적인 구상도 다양해졌다. 겨레하나는 이후 방향이 ‘전문교류’로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남북관계가 좋아지고 사업이 진행되면 갈수록 긴급 구호성 인도지원은 줄어들 거라고 본다. 이후에 전문 분야별 교류 쪽으로 가야 한다는 구상이다.

예를 들어 농업교류라면 농민 교류가 아니라 전문학자 간 만남을 통해 북과 우리의 농업이 상생할 수 있는 조건, 서로의 경제체제에 조응하면서도 협력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가고 그 안에서 민간의 역할을 찾아가려는 고민이다. 또 전문교류 할 때 북이 필요로 하는 기자재나 실험장비를 지원하면서 그 성과를 공유하는 형태로 가지 않겠나, 그에 대해 자신감이 있다.”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김일성종합대학 생명공학부에 항생제 소공장 건립을 지원할 때의 이야기이다.

 

남쪽에서 함께 간 기술자들이 공장설비 설치에 몰두해 있는 동안

나는 생명과학부 학장님과 사무실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학장님은 인정많고 따뜻한 이웃집 어르신 같은 인상을 주시는 분이었다.

그 분은 남쪽 통일운동가의 삶에 대하여 많이 궁금해 하셨다.

통일운동을 하면 감옥에 간다는데 6.15공동선언 이후에도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통일운동단체 일을 하면 생활은 어떻게 해결하는지, 두런두런 물으시면서 우리들의 삶에 대해 딱해 하셨다.

자기 삶을 챙기랴 통일운동하랴 얼마나 힘드냐며,

사무실에 있던 접대용 빵 한쪽이라도 더 먹어보라고 집어 주실 때는

정말 훈훈한 시골 할아버지 같아 감동이 밀려오기도 했다.

 

잠깐, 그 정도의 일에 감동해하느냐는 분들을 위해 잠시 설명을 해두어야겠다.

남쪽에서는 통일운동을 한다고 하면, 좀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는다.

남북관계가 열린 이후로 나아지긴 했지만,

시민단체 중에서도 별반 인기 없는 곳이 평화통일 분야이고,

인도지원단체 실무자들은 ‘퍼주기논쟁’으로 머리 뒷꼭지가 따갑기 마련이다.

그래서 북쪽에서 우리들을 통일애국운동을 하는 분들이라고 환대해 줄때마다,

북쪽이 마치 친정집처럼 느껴지며 대북 지원 기금을 마련하느라 쌓인 피로가 일시에 확 풀리곤 한다.

북쪽 분들이 이렇게 따뜻하며 정이 많다는 것을 느낄 때 마다,

‘민족의 동질성’ 같은 케케묵은 단어(?)들이 심장을 뛰게하는 신성한 열정으로 다시 살아나,

남북의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자유롭게 만나 흉허물없이 묵은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날을 기다리게 한다.

 

교수님께서 우리 아이가 몇 살인지를 물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지금 고등학생이고, 대학에 가면 학비 걱정이 태산인데,

등록금만 한해 1000만원이 넘는다’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위로를 기대하고 약간의 어리광을 섞어서 말이다.

 

그때 나는 교수님께서 부모노릇 하랴 통일운동하랴 정말 애쓴다며,

손이라도 잡아주실 줄 예상했던 것 같다.

이 어른이 얼마나 나를 딱해 하실까?

그런데 반응이 너무 뜻밖이다.

 

그림. 서영준 화백

 

애잔한 눈빛이 아닌 갑자기 장난기라도 발동한 듯, ‘웬 쾌재냐는 듯’ 생기어린 눈빛...

교수님께서는 갑자기 학생들을 몇 명이라도 불러와야겠다며, 금방이라도 자리를 일어나실 분위기다.

 

“요즘 우리학교 대학생들이 너무 철이 없어요.

자기들 학비를 국가에서 전액 부담하는 것이 고마운 줄 도통 모르거든!

등록금만 무료인 것이 아니야!

기숙사에서 무료로 재워주고, 교복도 나오고, 용돈까지 주거든?

근데 우리 학생들은 그게 얼마나 큰 혜택인지 모르고 당연시 여긴단 말야.

이 아이들한테 이경 총장 선생이

남조선 대학생들에 비해 자기들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설명을 좀 해주오,

국가의 고마움을 깨닫게!”

 

순간 얼마나 당황스러웠던지...

북쪽이 사회주의 사회이므로 사회보장 문제에서 남쪽보다 제도적으로는 한참 앞서있다는 것을 누가 모르는가?

그러나 남쪽에서 온 내가 북 대학생들을 만나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남쪽에서 온 통일운동가로서 북의 최고학부 학생들을 만나면 묻고 싶은 것도 많고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은데,

그 많은 이야기를 다 놔두고 ‘남조선, 이렇게 불쌍하게 살아요, 학생들이 부러워요’ 하라고?

 

아니, 그런 맥락이 아니다.

나는 남쪽의 대학생들이 그 어려운 조건에서도 얼마나 씩씩하게 공부하는가를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아르바이트 하랴, 취업 걱정 하랴, 무지무지 힘들지만

남쪽 우리 학생들, 그래도 그 애들이 남한 사회의 미래이지 않은가?

그걸 잘 알고 있는 우리 학생들, 힘을 실어주지는 못할 망정,

북쪽 학생들을 앞에 놓고 불쌍한 아이들을 만들어 버릴수는 없다.

 

그러나 내가 정작 당황했던 것은

내가 북쪽 학생들과 만나서 그런 대화를 하는 게 적절한가 아닌가하는 따위의 논리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교수님에게 나는 한참 아래연배이지만

그래도 함께 마음을 나누는 벗으로 느껴주기를 바랬던 마음에 상처가 났던 것 같다.

함께 통일을 해나가야 하는 남과 북의 사람들이 분단을 넘어 어느 지점에서 만났고,

서로의 처지를 걱정하고 염려해주는 마음...

남이나 북이나 나름의 조건에서 자칫 삶에 찌들 수 있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애를 쓰며, 노력하는 마음을 나누는 대화들....

교수님에게도 그런 대화를 기대했던 것 같다.

 

갑자기 그 교수님이 그저 북쪽의 노인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남북 어디에나, 노인들이 요즘 젊은이들이 철이 없다고 걱정하는 것은 다 똑같다는 생각...

그래, 사실 나와 같은 여성도 아니고, 분단 60년 넘게 다른 체제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몇 시간 대화 끝에 어떻게 친구 같은 말들을 나눌 수 있겠나?

그런 것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겠지...

 

아직 남과 북의 사람들은 서로에게 관찰자일 수밖에 없나 보다.

아직은 남북협력사업이라는 지극히 좁은 의미의 일을 함께 하며,

소통하는 방식을 간신히 배우기 시작한 교류 초년병들이다.

 

평양에 자주 가다 보니 친정집 식구들보다 더 자주 만난 북 안내원 선생들,

그래서 몇 주일만 못 보면 근황이 궁금하고 협의해야 할 일들이 밀려 안타까운데,

그러나 막상 또 평양에 가면 사흘도 못되어서 빨리 서울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나의 삶의 터전 서울,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나와 같이 분단을 가슴으로 앓으며 함께 남북화해협력을 꿈꾸는 사람들이 그리워진다.

이것은 아마도 6.15공동선언의 시대, 남북교류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의 신종 분단병인 것 같다.

 

그래도 이건 긴 과정의 일부일 것 같다.

한 10년 쯤 더 지나면, 지금보다는 훨씬 더 서로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대화들이 가능하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북과 사업협의를 해본 사람들이 가장 빠지기 쉬운 함정이

남쪽 분들이 제안한 사업을 ‘북이 하기로 동의했다’고 쉽게 오해해 버리는 경향이다.

그리고 약속해놓고 왜 지키지 않느냐며 ‘믿을 수 없는 북한’이라는 평가를 내리는 경우도 왕왕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것은 남과 북의 문화의 차이로부터 발생하는 오해이다.

 

북과 만날 때 남쪽 사람들이 북측에게 제기하고 싶은 말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북은 남쪽의 웬만한 의견에 대하여서는 아주 좋은 표정으로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지요’라고 말한다.

 

이런 말을 들은 남쪽 사람들의 대부분은,

머리에 뿔이 날만큼 고압적이라고 알고 있는 북한사람, 그것도 높은 관리가

정적으로 검토해본다는 반응에 ‘이건 된다는 뜻이구나’ 하고 주관적인 판단을 하며 쾌재를 부르게 된다.

 

사실 내가 보기에는 남쪽 분들이 제기하는 무수한 문제제기가

북쪽의 특성을 잘 모르고 이루어진 제안일 경우가 많은데,

북에서 일일이 이를 설명하기 난감해 ‘무난하게 대답해 버리는 것이 아닌가’ 싶을 때가 많았다.

 

그림. 서영준 화백

 

그러나 북은 그렇지 않단다. 그 이유를 유추해 보면 이럴 것 같다.

 

남한은 무제한적인 개인주의, 경쟁사회이다.

자연히 상대방의 제안이나 말에 대해 성급하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면, 손해를 보기 마련이다.

즉 제안의 내용이 비록 긍정적이라고 할지라도

보다 유리한 조건에서 협상하기 위해서는 ‘포커페이스’던가, 아니면 쌀쌀한 인상을 주고 볼일이다.

 

반면 북한은 집단주의 사회이다.

경쟁과 개인 능력의 돋보임 보다는

사회구성원 전체의 단합이 더 중요하고 전체의 단합으로 유지되는 사회이다.

집단을 중시하다보니, 자칫 사회의 발전의 주요 동력인 개인의 창의성이 무시될 수 있으며,

관료주의의 폐해가 커질 소지가 크다.

 

북한은 그를 방지하기 위해서 집단 구성원의 의견을 경청하며 

그 누구라도 적극적인 의견을 낼 수 있는 사회분위기를 만들려고 노력해온 듯하다.

 

우리는 흔히 북한이 ‘권력에 대한 맹종만이 지배하는 사회’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는데,

막상 북한에서 만난 접대원 등의 북한 사람들이

자기 감정과 의견을 스스럼없이 밝히는 씩씩함과 활달함에 놀라곤 한다.

북한에서 만난 사람들은 우물우물 하는 법이 별로 없다.

하나같이 주견이 강하고, 자기 의견을 굽힐 줄 모른다.

 

획일화라니? 천만에! 그건 북을 전혀 모르고 하는 말이다.

 

북쪽 분들과 같이 부담없는 한담을 나눌 때 (회의 할때 말고),

그분들이 서로 다른 의견으로 맹렬히 토론하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그런 장면이 벌어질 때마다 내가 “어라? 북은 초민주주의사회로군요?” 그러면

북 안내원들은 자기 주장에 더욱 힘을 실어

‘저 동무는 원래 답답한 친구야, 현실을 융통성있게 보지 못하는 탁상물림이지’ 한다던가

‘ 아니 저 동무야말로 사물의 본질을 뚫어보지 못하고 겉만 훓고 있다’든가.

자기 의견이 제일 올바르며 반대의 의견은 별로 고려할 가치가 없다고 박박 우겨대기 일쑤다.

 

그러면 그 사회가 어떻게 그렇게 일사불란하냐고?

그것은 아마도 격렬한 토론을 통해 그 집단의 결론이 내려지면 두말없이 따르는 풍토 때문이겠지.

‘의견’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풍토와 ‘의견’을 모두 수용한다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대립되는 의견을 모두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때만이

의견을 다 종합하여, 가장 훌륭한 의사 결정을 할수 있지 않을까?

자기의 주장이 상대방과 집단에 의해 긍정적으로 검토되었다는 것을 느낀 사람들은

설령, 그 의견이 다 수용되지 않더라도, 무척 행복해하며,

그 집단의 결정에 더 흔쾌히 따를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각설하고, 이런 경험을 비추어 보더라도,

북은 의견개진에 대하여 무척 활달하고 씩씩할 수 있는 사회풍토인듯 하다.

 

반면에 남한사회의 풍토에 익숙한 우리들은

일단 표정만이라도 긍정적으로 받아드리는 것 같으면 이건 100% 통과된 것이라는 착각을 할 법도 하다.

 

그러므로 나는 북 안내원이, 혹은 고위 간부가, ‘긍정적 검토’를 한다고 하면, 이렇게 통역을 한다.

‘마음은 잘 이해하나, 실현 불가능’!

내가 이런 나의 해석으로 도장을 쾅 찍어버리면, 북쪽 사람들은 섭섭하다며, 화를 내기도 한다.

 

"이경 총장 선생이 왜 우리들 마음을 몰라줍니까?

우리는 정말 긍정적으로 검토하거든요?

남쪽 분들이 우리 북쪽을 잘 모르니, 문제를 잘못 제기할수 있겠지요,

설령 문제제기 내용이 거칠고 투박하더라도,

그 마음속에 조금이라도 좋은 마음과 고민이 반영되어 있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그 마음을 잘 헤아려 보려 고민한단 말입니다"

 

나도 절대 질수 없다.

 

“남쪽 분들의 주장과 요구가 마치 실현될 것 같은 환상을 주는 것은 더 문제란 말입니다.

댁들은 좋은 이야기만 하는데,

그러면 남쪽 분들은 그 옆에 있던 내가 그 일을 추진하지 않는 것으로 오해하고, 나만 원망하지 않습니까?

남쪽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댁들이 자기들 마음을 알아 주는가 아닌가의 여부가 아니라,

자기의 요구가 실현될 수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인데

결국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들어날 때, 당신들을 얼마나 욕하는지 알기나 합니까?

거짓말쟁이라고 말입니다. 꼭 그런 말을 들어야 합니까? ”

 

이 입씨름은 아마도 ‘마음과 희망을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북한 안내원들과,

당장 실천적 방향을 구체적으로 도출할 수 있는가의 여부가 중요하다는 나의 입장의 충돌인지도 모른다.

 

또 어찌 보면 늘 실현가능한 협력방안을 만들어 교류를 이어 가야 하는 내 처지와,

평양에서 남쪽이 고민하고 제기하여 만들어 오는 ‘제안’을 기다리는 처지의

차이로부터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마 이 글을 본 독자들은 북쪽의 입장이 내 주장보다 더 일리있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의 역할은 남과 북을 연결시켜주는 것 까지이며

그 마음을 어떻게 소통하는가의 여부는 당사자들이 해결해나갈 몫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소통은 당사자들의 몫이라도,

자칫 남쪽 분들이 상처받을지도 몰라 걱정하는 나의 마음도 헤아려주기 바란다.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10만이 참가하는 대 집단체조 아리랑’ 공연이 진행되는 한 달 내내

평양 양각도 호텔은 남쪽 손님들로 시끌벅적 했다.

남과 북의 풍속과 생활습성이 달라,얼마나 많은 일들이 발생했는지....

 

그 중 하나가 욕실 사용 문제였다.

남쪽 손님들이 묵은 객실마다 욕실 바닥의 물이 넘쳐

침실 양탄자가 물에 흠뻑 젖는 일이 비일비재 발생하였고,

제때 갈아주지 못한 양탄자에서는 곰팡이 냄새가 풍겨났다.

 

사실 내가 처음 평양에 왔을 때도, 이런 실수를 했었다.

무심코 머리를 감고 나니 욕실 바닥이 온통 물바다가 되어 있었다.

평양 욕실에는 바닥에 배수구를 아예 설치하지 않은 탓이다.

물난리가 나고 나서야 배수구 문제를 알게 되었고

‘북한이 얼마나 돈이 없으면 배수구 시설조차 아껴야 했을까’ 싶어 내놓고 투덜거리지도 못하고

넘친 물을 수건으로 연신 빨아내어 가까스로 수해(?)를 막았었다.

 

그날 저녁 식사 때 그 이야기를 하자.

 

함께 왔던 신부님께서 평양만 그런 게 아니라, 유럽에도 욕실에 배수구가 없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유럽 사람들은 욕조 안에서만 물을 쓰는 것이 습성화 되어있어,

욕실 바닥에 배수구를 따로 설치할 필요가 없단다.

남한이 미국문화에 영향을 받은 것과 마찬가지로 북한은 러시아, 동구라파의 풍습에 영향을 받고 있다.

 

서울 목욕탕의 풍경이 생각났다.

우리 어머니는 뜨거운 물이 풍성한 동네 목욕탕에 가면

속옷 한 가지라도 더 빨아치우려고 아둥바둥했고,

더운 물을 팍팍 퍼부어 대면서 목욕비 투자 대비 만족도를 최대한 높이려고 하셨다.

우리네 욕실 풍습은 바닥에 편하게 앉아 때를 밀면서 물을 펑펑 부어내는 것이 아닐까?

점차 샤워부스나 욕조에서 간단하게 샤워를 하는 것으로 바뀌고 있지만,

욕실바닥에 배수구가 당연히 있는 조건에서 욕

조에 커튼을 안으로 드리우고 조심조심 샤워를 하는 일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림. 서영준 화백

 

하루 1000명 이상의 남한 손님들이 빚어내는 욕실 사고는

양각도 호텔 측으로서도 감당하기 어려운 대형 사고일 수밖에 없었다.

양각도 호텔 측의 빗발치는 항의가 우리 상황실로 쏟아져왔다.

남쪽 손님들이 모든 호텔 객실을 물바다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난감 난감... ㅠㅠ

 

남쪽 분들에게 욕실 바닥에 배수구가 없다고 조심하라고 하면,

사람들은 북한이 후지다고 투덜거릴 것이 뻔하다.

나름 비싼 돈을 내고 관광을 왔는데,

국제급 호텔이라고 해놓고 시설이 낙후되었다고 생각한다면 별로 기분 좋을 일이 아니다.

그 유쾌하지 않은 기분을 남쪽에 내려가서 입소문으로 풀면,

힘들게 마련된 평양관광의 붐에 차질을 빚을지도 모른다.

또 남쪽 사람들의 투덜거림을 북측에서 듣는다면 그 또한 기분이 좋을리 없다.

그러니 단순히 조심하라고 할 것이 아니라,

남쪽 사람들이 북한의 시설낙후문제로 바라보지 않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또 이런 문제를 아무리 사전교육 한다고 하더라도 몸에 밴 목욕 습성을 고칠 수는 없을 것 같아

방방마다 욕실 문 앞에 대문짝만하게 큰 글씨로 인쇄물을 써 부쳐야겠다고 생각했다.

 

 

양각도 호텔은 유럽식이라 욕실 바닥에 배수구가 없습니다.

욕조 안에서만 물을 사용해 주십시오

-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

 

 

 

 

 

 

라는 내용의 인쇄물을 만들어 상황실 직원 8명이 팔을 걷어 부치고 해결할 결심을 하였다.

호텔 프론트의 힘을 빌리지 않고,

층층이 청소하시는 아주머니들의 도움을 받아 방을 따고 들어가 인쇄물을 붙이는 방식이었다.

북측 도움 없이 상황실 직원들의 힘만으로

수 백 개의 방에 인쇄물을 붙이는 일을 조용히 해결한 우리의 열정에 스스로 감탄, 만족해하는 순간

갑자기 민화협 담당 선생이 달려오더니 목청을 높였다.

양각도 호텔 측에서 남측 상황실 일꾼들이 자기들의 동의도 없이 객실마다 헤집고 돌아다닌다고

항의가 들어왔다는데 ‘이경 선생이 이렇게 제멋대로 질서를 어지럽힐 줄 몰랐다’며,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아... 또 어떻게 설명하나?

양각도 호텔 측에 미리 양해를 구하지 못한 것을 설명하기가 좀 난감하다.

할수 없이 또 장황하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설명하자 점차 눈꼬리가 부드러워지더니

급기야 ‘정말 수고가 많다. 그렇게까지 사려 깊은데 놀랐다’는 치하(?)의 발언까지 해주며 돌아갔다.

 

아! 정말 평양에서의 모든 상황은 그 자체로 돌발 변수다,

물을 욕조 안에서 쓰는가 아닌가 같은 생각지도 못한 일들까지

한바탕 소동을 피워야 할 줄이야 차마 예상치 못했다.

 

인쇄물을 붙인 뒤로 욕실 바닥에 고인물이 침실로 범람하는 소동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인쇄물의 효용이 크다고 판단한 양각도 호텔 측에서는  그 인쇄물을 그 뒤로도 1년 이상 수거하지 않고 붙여 두었고,

덕분에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가 마치 양각도 호텔에 상설적으로 사무실을 두고 있는 듯한 착시효과가 있었다.

 

광고비 내지 않은 우리 단체의 홍보효과가 최고! 남과 북 민간의 갈등해결사 겨레하나 최고!!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식사배달’은 남쪽 사회에서 일상적인 일이다. 자장면 신속배달 시스템은 아마도 세계 최고일지 모른다.

평양에서도 전화로 식사를 배달시켜 먹는 경우가 많을까? 그러면 금방 오나?

궁금할 수도 있는 문제였지만 그런지 안그런지 막상 접할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2006년 9월 말부터

<평양 문화유적 답사>와 <10만이 참여하는 대 집단체조 아리랑>공연 관람을 위한

남측 관광단의 대대적 초청사업이 한 달 이상 진행되었다.

하루 1000명이 넘는 남측 관광객들의 평양 관광 안내와 기타 여러 가지 업무지원을 위해

상황실이 설치되었고 나는 상황실장을 맡게 되었다.

아시아나와 대한항공의 점보급 비행기 3대가 하루 1000명씩을 쏟아내고

다시 그만큼을 싣고 가는 일들이 진행되는 동안, 양각도 호텔의 상황실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평양 상황실과 남쪽 겨레하나 사무실을 잇는 직통전화가 개통되어 수백 명의 참가자 명단을 팩스로 받고,

그에 대한 초청장을 북측 해당기관으로부터 받아서 남측 겨레하나에 보내주는 일이 매일 반복되었다.

또 비행기가 평양에 도착할 시간이면 순안공항에 마중을 나가고, 평양 관광에 앞서 기본 교육을 하고,

호텔 방을 배정하고, 북과 논의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안건을 정리하여 만남을 주선해주기도 하고...

분단이래 남쪽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북에 오는 것은 처음있는 일이었고, 그에 따른 사건사고가 연일 터졌다.

우리 상황실 직원 6명은 매일 초단위로 터지는 돌방상황에 대처하느라 이리저리 뛰어다녀야 했다.

그때 발생한 이른바 평양의 초 메머드급 사고는 다음 편부터 몇 번에 걸쳐 소개하기로 하고,

오늘은 일단 운반식사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겠다.

 

그림. 서영준 화백

 

아무튼 그때 너무 바빠서, 식당으로 내려가 밥을 먹을 형편이 못되었다.

서울에서 같으면 사무실 직원에게 ‘김밥 한 줄만 사다 달라’고 한다던가 했을텐데...

이런저런 궁리를 하면서 불현듯 신속배달 동네 중국집이 그리워졌다.

‘아 그렇지! 여긴 자장면은 아니어도 룸서비스는 될지도 몰라!!’하며

프런트로 전화를 걸어 룸서비스가 가능한지 물었다.

프런트 담당직원은 “아 운반식사요? 네 가능합니다. 인차(남측의 '금방'이라는 뜻) 가져다 드리겠습니다”고 하였다.

나는 이제 곧 식사가 오면 몇 숟갈 뜨고 빨리 나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주문한 시간이 5시 쯤이었는데, 인차는 무슨 인차!

30분이 지나고 1시간이 지나고 2시간이 다 되어가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다.

남쪽에서 우리가 흔히 배달시켜 먹는 짜장면은 좀 과장해 말하면,

전화를 끊기도 전에 벌써 음식이 도착한다고 하는데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을까?

깜박 잊어먹은 것이 아닐까? 설마...

재촉전화를 하지말고 믿고 기다려야지 하며 참고 참다가 나는 그날 결국 저녁식사를 포기하고 상황실을 나서야 했다.

급한 일들을 해결하고 밤 9시가 다 되어 올라오니 텅빈 상황실에 다 식어버린 식사가 덩그마니 놓여 있었다.

다음날도 하루 종일 잊고 있었다가 저녁 식사 무렵 다시 룸서비스를 빨리 가져다 달라며 신신당부를 하였는데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아! 더 이상은 못 참겠다.

나같이 중요한 단골(?) 고객의 입장을 이렇게 무시하다니!!! 정말 부화가 치밀었다.

‘5분 내로 도착하는 자장면’을 상상했는데, 양각도 호텔이 나같이 중요한 고객에게 불친절하다니!!!

(그때 양각도 호텔 측은 하루 1000명의 손님들을 전부 내가 초청해 오는 줄 알고 있었으니,

사실 따지고 보면 나는 정말 중요한 VIP 중에 VIP 아니겠는가? )

사흘째 되던 날은 더 이상 프런트에 전화하지 않고, 식당으로 달려갔다.

 

얼굴이 낯이 익은 접대원 동무에게 격렬하게 따지고 싶은 마음은 강렬하였지만,

그래도 나름 침착하고 우아한 모습으로 ‘운반식사가 늦어져 저녁을 계속 굶었는데 왜 이렇게 늦어지는지,

좀 신경 써서 가져다 줄 수는 없는지,

근데 그러기 위해서는 프런트가 아닌 식당의 책임자 누구한테 이야기하면 되는지’를 나름 점잖게 물었다.

나는 그렇게 차분하게 물어보면, 그 접대원동지가 깜짝 놀라고 많이 미안해하며,

“내일부터는 주문 즉시 바로 가져다 드리겠다”고 답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북쪽의 접대원들은 무척 친절하므로, 식사 운반이 늦어져 고객이 밥을 굶었다니 얼마나 미안해할까?

저 예쁜 접대원 동무가 쩔쩔매며 이야기하면

 나는 가볍게 미소를 띄며 내일부터는 신경써 달라고 여유있게 이야기해야지...

그런데 그 접대원 동무의 반응은 완전 달랐다. 완전!!!

 

  그림. 서영준 화백

 

너무 별일 아니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 식사가 늦어서 문제이십니까? 그러시다면 몇 시까지 가져다 달라고 주문해주시면,

딱 그 시간에 식사가 갈 것입니다. 내일은 몇시까지 갖다 주면 됩니까?”

이 얼마나 황당한 시츄에이션인가!

운반 시간까지 예약주문하면, 일없을 거라는 반응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돌방상황이었다.

단단히 마음잡고 따지러 간 나만 뻘쭘해지고....

톡톡튈 만큼 상큼한 모습으로 이야기하는 접대원동지를 보며,

방금까지 내가 무엇을 가지고 화를 참고 있었는지....

갑자기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묘한 처지가 되어 버렸다.

 

사실, 식사 운반시간을 미리 예약해 놓는 것은 의미가 없다.

연일 예상치 못한 사고가 빵빵 터지는 조건에서 언제 어디로 달려가야 할지,

언제 짬을 내어 급하게 밥을 시킬 수 있을지 모르는데 식사 운반시간을 예약하다니???

이건 해결 방법이 아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 갑자기 운반식사를 몇 시까지 가져다 달라는 뜻이 아니었다고 한다면 저 접대원 동무는 뭐라 할까?

북의 시스템이 원래 그렇게 되어있는 것 같은데 갑자기 전화해놓고,

‘빨리 빨리’를 외친들 그게 실현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 같았다.

또 이제와서 운반식사를 안하겠다고 하면 더 이상할 것 같아

별 수 없이 “날마다 6시로 해 달라 ”고 하는 정도로

시간 예약주문으로 입장을 말해놓고 돌아서면서 나는 금새 후회하기 시작했다.

‘저녁을 굶어야 하기는 마찬가지일 것 같은데, 괜히 저녁식사 값만 계속 나가겠군’,

‘그냥 빵이나 몇 개 사다 놓을 걸’ 하면서....

 

그 뒤로 더욱 곤혹스러운 사태가 발생했다.

날마다 6시면 거의 1분도 틀리지 않고 상황실로 운반식사가 날라져 왔고,

그 시간에 맞춰 밥을 먹을 형편이 되지 못했던 나는

주구장창 밥이 식어서 도로 내어놓는 일이 10일 이상 지속되었다.

이를 취소하자면, 또 누구한테 어떻게 이야기하면 되나?

 

그림. 서영준 화백

 

평양에서는 룸서비스, 식사배달 같은 일들이 일반화되어 있지 않고,

그러다보니 당연히 시스템화되어 있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운반식사’가 불가능 한 것은 아니므로

갑자기 손님이 프런트에 주문을 하면, 프런트에서는 식당에 연락을 하고,

식당 접대원들은 다시 지배인에게 이 문제를 보고하여 음식을 제작할지 말아야 할지,

결제를 기다려야 하니, 두 시간 이상 걸리는 것은 당연하다.

실제 운반식사로 배달되어온 쟁반의 내용을 보니, 운반식사용으로 따로 제작된 것 같았다.

 

그런데 이런 남과 북의 차이를 모르거나 체질화 되어 있지 않은 남쪽 방문객들에게

북의 운반식사는 정말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이번에는 남북 협력 사업에 대한 협의 중에서 발생했던 에피소드를 소개하겠다.

남과 북의 시각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경험이라 글을 읽는 분들이 재미있어 할 것 같다.

 

2005년 7월부터 몇차례에 걸쳐 있었던 '한국 관광공사'의 실무협의였다.

'관광공사'는 공사 주도의 북한관광을 성사시켜, 한반도 전체의 관광벨트화를 실현하려는 계획이 있었다.

금강산이나 백두산 관광 등 북한의 관광문제는 모두 현대아산에게 밀렸던 터라,

특히 평양 관광 만큼은 관광공사 주도로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나름 절박했던 것 같다.

 

관광공사의 입장은 도로안내판 재설치나, 기타 북이 원하는 평양 리모델링을 도와주고,

관광공사의 이름으로 시범관광부터 해보자는 계산이었다.

 

개성에서 두 세번의 실무 접촉 끝에 북에 적정량의 페인트를 지원하고,

전세 비행기 한 대 정도의 대표단이 평양, 묘향산을 방문하는 것으로 대강의 윤곽이 그려졌다.

논의가 비교적 빨리 마무리 되어 합의서에 양쪽이 모두 싸인 만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 순간 예상치 못한 복병이 나타났다.

 

관광공사는 '평양 리모델링용 페인트를 지원하고 시범 관광을 한다'는 내용이 명시된 합의서의 남측 초안을 제출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북이 “관광에 합의한다는 내용은 명시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전혀 뜻하지 않은 돌발 상황이었다. 이제까지 논의 된 사항이 아닌가?

 

관광공사는 ‘평양 시범관광용’이라는 명분으로 살림집(아파트) 외벽용 페인트를 지원할 수 있다고 누차 이야기했고,

북도 관광공사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고 논의를 진행시켜 왔지 않은가 말이다.

그런데 북은 관광공사의 상황을 이해한다는 것과, 합의서에 '관광'이라는 말을 명시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주장하였다.

 

그 이유인즉,

북은 남쪽 국민들에게 '평양 관광사업을 허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국가적 시책이 정리되어 있지 않은 조건에서

마치 관광공사와 그에 대한 논의가 있었던 듯 '관광'이라는 표현을 쓸 수는 없다고 하였다.

 

평양에 올수는 있으나

페인트를 지원해준 것에 대하여 답례로 오는 것이지

일반 관광객들에게 관광시켜주는 것은 아니란다.

 

관광공사는 난감해 하였다.

북에 페인트를 지원할 수 있는 명분은 시범관광을 하기위한 것인데,

그 명분을 합의문에 명시할 수 없다면 기금 마련도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저런 속사정을 털어놓으며 장기적 관광합의가 아닌 일회성이라는 점,

그저 명분용 문구일 뿐이라고 사정도 하고,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그러나 시종일관 대꾸도 없이 묵묵부답으로 앉아 있는 북!

적어도 30분 이상 그렇게 앉아 있었을까?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내가 '관광'이라는 표현을 '참관'이라고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더니

북은 표정이 단박에 환해지면서 동의한 반면,

이번에는 관광공사 측에서 '참관'이라는 뜻은 동의하나 합의서에 명시할수 없는 표현이라고 '불가'를 주장하였다.

 

다시 침묵의 시간....

 

나는 처음에는 북이 유연성이 부족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조금 더 생각해보니, 이를 단지 유연성의 문제로만 보는 것은 너무 가벼운 판단인 듯 싶었다.

'관광'이라는 문구에 그토록 예민할 수밖에 없는 북의 입장이 나름 이해되었다.

 

'페인트를 지원하고, 평양에 가는 것'의 의미는 정확히 보면 순수한 인도지원이라기 보다는

‘관광을 위한 선 투자 개념’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었고,

북은 그 당시의 시점에서 관광공사 방문이 관광개방으로 비추어 지는 것을 극도로 경계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던 것 같다.

 

'북이 얼마간에 페인트를 받고 관광공사의 평양 관광이라는 시장개방정책에 합의해준다? '

<개혁, 개방>이라는 자본주의적 시장개방 정책과도 잇닿아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서로의 입장이 이해가 되니, 단지 유연성의 문제로 보고 합의를 유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들었다.

 

관광공사는 결국 북에 페인트 지원을 했고,

얼마 후 2005년 10월 22일부터 25일까지 133명의 대표단이 북의 융숭한 대접과 안내를 받으며 평양을 참관(관광)할수 있게 되었다.

 

합의문은 어떻게 작성되었느냐고? 그것은 여기에서 공개하지 않겠다.

나는 남과 북의 엄청나게 예민한 차이를 넘나들며 협력사업을 해야 하는 협력사업자니까!

 

 

그림. 서영준 화백

   

다만 여기서 정작 내가 정말 아이러니 하게 느껴지는 장면을 한가지 더 이야기해야겠다.

 

돈을 들고 북을 지원하겠다는 관광공사는

북을 달래기도 하고, 호소하기도 하고, 어떻게 하든 합의서를 작성하려 땀을 뻘뻘 흘리는데,

북은 '관광불가'를 선언한뒤, 남측을 설득하려고 애쓰지 않으면서 침묵을 지키고 앉아 있는 장면에 대해서 이다.

이런 모습을 보면, 북의 태도가 고압적이라고 느낄 수 있다.

 

세상에!

돈을 들고 있는 쪽에서 지원을 해주겠다고 이렇게 저자세일수 있을까?

 

그러나 진실은 이런 것이었다.

북은 인도적 지원사업자인 내게도 늘 이렇게 이야기한다.

 

'동족의 어려움에 대하여 함께 해주겠다는 순수한 마음을 우리는 고마워합니다.

겨레하나는 댓가성이 아닌 순수한 지원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북남협력사업은 민족의 미래를 걱정하는 통일애국사업입니다.

댓가성 거래가 아닌 통일애국사업을 해주시는 분들에게 우리가 할수 있는 예우는 다 할 작정입니다.'

 

그러니까 북은 관광공사가 '명분'을 주장하는 속사정은 이해하나,

어떻게 하든 이 사업이 통일애국사업으로 정리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며,

시범관광을 위한 댓가성 지원은 용납할 수 없어 관광공사의 입장이 정리될 때 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이를테면, '당신들은 순수한 통일애국사업을 원하는가, 아니면 거래를 원하는가?' 이 질문을 해 놓고는

관광공사의 답을 기다리는 것이다.

 

아무튼 자본주의적 시각에서 보기에 이상한 현상이다.

북을 지원해주겠다는 남측에서 북에 이것 저것을 합의해 달라며 아우성을 치거나 화를 내고,

정작 도움을 바라는 북은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고....

 

북이 너무한가? 아니면 남이 경박한가? 그 판단은 독자들의 몫이다.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 북의 '고난의 행군' 과연 나에겐 어떤 의미였던가?

 

북의 ‘고난의 행군’[각주:1] 은 90년대 중반부터 불어닥친 북한의 위기상황을 극복한 방식에 대한 이야기이다.

 

3년간 연속된 대 홍수로 온 나라가 물에 잠기는 등 유래없는 재앙이 몰아닥쳤다.

또 갑작스런 동구 사회주의권의 몰락으로 구상무역[각주:2] 이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북한 경제는 근본적으로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국제무역 결제 방식이 바뀌어 석유와 식량을 수입할 달러를 구할 수 없어,

아사자가 속출하고, 기차와 자동차는 멈추었다.

물에 잠긴 광산에서는 더 이상 석탄을 캘 수 없었고,

기름과 원자재 없는 공장은 줄줄이 문들 닫을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북의 최고 지도자 김일성 주석의 사망까지 덮쳐,

북한은 아마도, 3일내, 혹은 3주일 내, 그것도 아니면 3개월 내 망할 것이라는 소문이

국제사회에 파다할 정도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자신들의 체제에 순응 편입하기를 거부하는 북한을

경제적으로 더욱 봉쇄하고, 압박하는 전술을 구사하였다.[각주:3]

당시 상황은 러시아도 중국도 미국에 맞서 북과 공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공장도 멎고, 전기도 끊어지고, 먹을 식량은 없는 나라!

그런 나라가 생존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90년대 중후반 그것이 북한의 실제 모습이었다.

 

조국의 절반이 이렇듯 처참한 지경임에도 불구하고,

남한에 사는 우리들에게 이 재앙은 함께 극복해야할 뼈아픈 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저 '동토의 땅, 북한! 2대째 내려오는 그 독재자의 나라에 가엾은 주민들만 굶어 죽네'라는 느낌이었다.

먼 아프리카 어느 오지의 가난을 바라보는 같은 것이 객관적인 평가였을까?

아니 그보다는 더 냉소적으로, ‘강 건너 불구경’하는 분위기였다는 것이 정직한 이야기이다.

백만 아사설이 심심치 않게 언론에 회자되면서

97년 나는 잠시 북한 동포돕기운동에 아들 아이의 돌반지를 팔아 성금을 낸 적이 있지만,

그때만 해도, 북의 가난의 실체에 대해서 구체적 표상으로 다가오지는 않았었다.

 

 

그림. 서영준 화백

 

아마도 반공반북 교육으로 머릿속에 철저히 무장된

분단의 다른 한쪽 대한민국의 국민들에게는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북한은 한 핏줄도 이웃도 아니며, 그저 관념 속에 존재하는 이상한 동네,

또 그런 이상한 동네가 과연 실제 하는지 실감조차 할 수 없는 거대한 감옥같은 이미지일 뿐이었다.

 

그러나 북한의 재앙에 대하여 아무런 표상을 갖지 못했던 진짜 이유는 분단으로 인한 이유만이 아니었다.

대한민국에서 살아온 나에게 수해나, 빈곤의 문제가 아무리 심각해도,

그것은 일부 지역, 일부 계층의 문제였지, 전 국가적 문제인 적은 한번도 없었고,

'나'와 '우리' 에게 당장 닥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다.

고도로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 대한민국에서 ‘빈곤의 문제란

국가적 문제가 아닌 일부 저소득층의 문제’일 수밖에 없었고,

자연재해란 일부 시골에만 해당되는 지극히 예외적인 우발사태에 불과한 문제라는 뜻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국가적 빈곤’이라는 말 대신에 ‘국가부도 사태’라는 말이 심심찮게 회자된다.

국가부도 사태를 예감하게 되면 온갖 것을 내주고라도 외자를 끌어들이고,

외자의 요구에 의해 국가적 구조조정에 들어가게 되면 계층 간의 갈등이 엄청나게 증폭되고,

마치 나라 전체가 외국자본이라는 전당포에 명줄을 저당 잡힌 꼴이 되어도 별수 없이 항복 선언을 한다.

 

또 항복 선언을 할지언정, 그 나라의 브랜드 가치, 외양적 화려함을 포기해서도 안된다.

그 모든 것이 ‘자본을 끌어올 수 있는 중요한 담보’이므로 그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속이 곪아도 겉은 화려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악순환?

국가적 경제위기인 국가부도, 그에 대한 자본주의 국제사회가 대처하는 모습의 정석이다.

 

그런데 2001년 내가 본 평양의 남루한 모습, 숨기지 않은 국가적 빈곤!

그것은 그전에 내가 한번도 상상해보지 않은 희한한 풍경이었고 설명하기 힘든 충격이었다.

 

북한은 정말 자본주의식의 선택을 하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하지 않은 것일까?

또 북한은 자본주의식의 선택 대신 과연 무엇을 선택했나?

정권 유지인가? 아니면 북한의 말대로 국가적 자주권인가?

 

이후 북한을 드나든 10년간 늘 느껴야 하는 원초적인 질문이다.

평양은 나에게 그렇게 조용한 충격으로 ‘사회주의 자주국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위용을 드러냈다.

 

 

 


  1. 1990년대 중ㆍ후반 국제적 고립과 자연재해로 수백만 명의 아사자가 발생하는 등 북한이 경제적으로 극도의 어려움을 겪은 시기에 제시된 구호를 말한다. 원래 고난의 행군이란 말은 1938년 말∼1939년 김일성 주석이 이끄는 항일빨치산이 만주에서 혹한과 굶주림을 겪으며 일본군의 토벌작전을 피해 100여 일간 행군한 데서 유래했다 [본문으로]
  2. 일정 기간 동안의 수출과 수입이 균형을 이루도록 두 나라가 협정하여 차액 결제를 위한 별도의 자금 지불을 필요로 하지 않는 무역 제도 [본문으로]
  3. 베트남 전쟁 당시 북한은 베트남에 전투비행사를 보내 미군 전투기를 수없이 떨구어주었으며 부상당한 많은 베트남 병사들을 평양 병원에 옮겨 극진히 치료해주었다. 고난의 행군 시절 북한은 그 베트남에게 쌀 지원을 요청했지만 베트남 당국자들에게 외면 당했다. 베트남 정부는 몇 줌 안 되는 쌀을 주면서 ‘미국이 북한에 식량지원하는 것을 반대하기 때문에 지원할 수 없다며 이해해달라’고 애청하였다고 한다. 이북의 외교관은 분노의 음성으로 그 쌀을 하노이에 있는 거지들에게나 주라고 하면서 그냥 돌아갔다고 한다. 이것만 보더라도 러시아 패망이후 미국이 철저히 북한을 봉쇄한 것이 얼마나 잔인했는지 잘 알 수 있다. 북은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출처] 브루스 커밍스가 바라본 북한(1)-70년대에는 북한이 더 잘 살았다 [본문으로]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 북과 처음 부딪친 문제; 여성 흡연과 여성활동가를 처음 본 북 선수들!


2001년 4월 초 중순 무렵 금강산에서 이루어진 북 민족화해협의회 선생들과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당시 나는 갓 출범한 ‘통일연대’의 사무처장이었고,
남북접촉의 목적은 ‘6.15공동선언 1주년 기념 금강산 민족통일대토론회’ 개최를 위한 실무협의였다.)

지금은 친구처럼 친근한 사이가 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난생 처음 만나는 북한 사람들,
그것도 민간교류의 방향 문제를 놓고 이루어진 만남인 터라, 사실 적지않게 부담스러운 만남이었다.
북과의 실무협의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예상문제를 내어 놓기도 힘든,
‘설레임’ 보다는 '새 역사를 열어가는 중요한 만남‘이라는 생각에
마치 시험공부를 전혀 안한 수험생처럼 불안하고 초조한 여정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우리는 가벼운 눈웃음을 지으며 악수를 했을 뿐 서로 어찌할 바를 몰라 쭈뼛쭈뼛 했던 것 같다.
그때 여성은 나 혼자였던가? 나중에 대한 적십자사 부총재를 지낸 이현숙 선생님이 같이 계셨던가?
북측 사람들은 나를 보며 더욱 안절부절 못하더니 전혀 예상치 못한 황당한 말을 했다.

'진보를 대표하는 대(?)통일연대 사무처장이 여자라고는 상상도 해보질 않았다'는 둥
'이럴 줄 알았으면 여자선생 한명을 데리고 나올 걸 그랬다'는 둥
아마도 그 어색한 처지에 대해 그들이 할 수 있는 배려의 말들이었을 테지만,
나는 그때, 그 말 덕택에 적지않게 당황했다.


민족의 중요한 문제를 협의하러 나온 실무대표자에게 갑자기 여성 안내원을 붙였어야 한다고?...
서로 직책으로 이야기하면 되었지, 같은 급의 북측 대표가 아닌 여성 안내원이라니 가당키나 할까?...
북에서 남성과 여성 사이에는 정상적인 업무협의가 불가능 하다는 뜻일까?...
북은 이미 오래전에 여성해방이 완료(?)되었다는데, 북
을 대표하는 민화협 관계자의 입에서 남쪽의 완고한 어르신에게나 들을 수 있는 말이 왜 튀어나올까?...

북측 선생들은 배려를 한 이야기였지만 내게는 마치 성차별적인 발언으로 들렸고, 갑자기 풀이 죽었다고나 할까?
보자마자 <여성 문제> 같은 이번 실무협의의 의제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문제로 따지기도 어려워
속앓이를 하면서도, 아무튼 ‘여자는 여자 안내원이랑 이야기해야 한다’며 안타까워 하는 분들과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하기는 애초에 글렀다는 생각에 맥이 빠졌던 것 같다.



그 뒤 10년간 북측 선생들과 나름 친해진 이후
북의 여성문제를 보는 시각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입씨름을 한 것이 한 두번이 아니다.
북쪽 분들은 남쪽의 여성 활동가들이 성차별적인 문제에 얼마나 민감한지를 도통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북쪽 노래 "여성은 꽃이라네" 를 우리를 배려한다고 들려줄 때마다
남쪽의 여성 활동가들은 질색 팔색을 해도 소용이 없다.
'공화국은 이미 여성들이 해방되었다'만 주장할 뿐
아직도 남쪽에서 여성문제로 투쟁해야 하는 여성들이 얼마나 전투적으로 그 문제를 바라보는가에 대해서는
도무지 공감해주려 하지 않는다.

이런류의 논쟁은 후에 다시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기회를 갖는 것으로 하고 여기서는 각설하고.
다시 금강산 만남으로 돌아 가보자.


아무튼 나는 그때부터 더 할 말이 없었다.
(함께 간 남자 실무 대표들... 그들은 모두들 나의 상사였고, 선배들이어서,
사실 나는 진보진영을 대표하여 온 실무책임자이긴 했지만 사실 발언권이 그닥 없었다.)
그래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는데...

무심코 처음 담배를 꺼내 들었을 때, 일순 분위기가 싸아 해지는 것을 감지했다.
북측 사람들의 표정은 <당황>을 숨기려는 듯 어색함 그 자체였다.

여성 흡연을 처음 보는 듯!!!

그런 것은 남쪽 영화에 나오는 타락한 여성들이나 하는 행동으로 이해했던 듯, 무어라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때 북측 인사들의 그 어색한 표정을 같이 간 선배한 분이 이렇게 표현하였다.
'60년대 말에 가수 윤복희가 미니스커트를 입고 처음 김포공항에 나타났을 때 우리 국민들의 충격과도 같은!'

물론 북측 선생들은 곧이어 아주 자연스럽게 라이터를 챙겨주었지만
할머니가 아닌 젊은 여성의 흡연은 거의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 분명했다.
아마도 우리가 북측 사람들을 생각할 때 자칫 머리에 뿔이 났는지 안 났는지를 궁금해 한다면,
북쪽 분들은 담배피우는 남쪽의 여성 활동가를 보면서,
이것을 어떻게 정서적으로 어떻게 수용해야할지, 체증에 걸린 듯 했다고나 할까?

북쪽 분들은 중요한 협의에 나와
남쪽의 여성 활동가가 담배를 피우는 것이 옳으니 그르니 자신들의 생각을 절대 내색하지 않는다.
그저 상대의 입장을 존중하고 배려할 뿐!

그러나 나는 그 당시 금강산 협의에서 처음 담배 피는 여성 활동가를 본 그들의 그 놀란 눈망울을
지금도 아주 생생하게 기억한다.



실무협의 사이사이 휴식시간에 북측 선생들은 내게 통일연대 사무처장 맞냐며,
그러면 데모하다가 감옥도 갖다 왔냐며 많은 것을 묻고 궁금해 했다.
그러면서도 '남측 민화협 분들이야, 정부랑 친한 인사이니 우리와 이야기해도 괞찮겠지만,
운동권 출신 통일연대 실무자가 이렇게 북측 인사와 이야기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인지' 걱정스러워,
선뜻 다가오기를 주저주저 했다.

우리가 '통일부의 허락을 득하고 온 것이므로 상관없다'고 조금 뻐기면서 이야기해도
남쪽의 국가보안법을 둘러싼 상황의 엄중함을 철저히 교육받았는지,
경각심(?)을 버리지 못한 듯 우리 근처로 와 말을 거는 것조차 조심 또 조심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렇게 시작하였다. 남과 북의 민간 실무대표들의 첫 만남은!.
그 무슨 통일담론이니 6.15공동선언이니 하는 거대 담론에 대해서 열띤 토론들이 있었지만,
사이사이 서로의 차이에 화들짝 놀라고, 
채 이해되지 않지만 서로를 <배려>하고 그 것이 <배려>로 느껴지지 않아 또 당황하고.
그러면서 서로를 이해하는 코드가 어떤 것인지를 조심스레 찾아나서는 긴 여정은 이렇게 시작하였다.


 



신고
Posted by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나는 수없이 북한을 드나든 몇 안 되는 남한 사람일 것 이다. 한 100번 쯤 될까?


일반 관광이나, 기자로서가 아닌 ‘협력사업자’로서의 방북이었다.
처음에는 3년간은 6.15, 8.15 등 남북공동행사를 준비하기위하여,
그 이후에는 인도적 대북지원단체의 사무총장으로, 인도지원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문화교류를 논의하기 위해서
어떤 때는 한달에 서너차례 평양 개성 금강산 등 북한을 찾았다.


남과 북의 서로 다른 입장과 이해를 서로 조정하여 공통의 합의점을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한편에게 너무 당연한 상식도 상대편에게는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발생하고,
서로간의 오해가 축적되어, 협력사업이 성사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심정을 열정적으로 토로하다보면 상대방은 점점 더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게 되고,
서로 다른 언어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대화가 완전히 단절되고 소통이 먹통되는 순간들도 왕왕 있다.


그럴 때 남쪽 인사들은 북이 남쪽의 실정도 모른 체 너무 많은 댓가를 요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경제협력 등에서 북이 너무 진입단가를 높게 책정해,
남쪽이 받아들일 수 없는 무리수를 둔다는 말들이 무성하게 나돈다.
또 사회문화교류에서 북이 남쪽을 외국과 달리 높은 진입장벽을 친다거나,
혹은 제한규정을 강화해서 ‘동포애’ 운운하면서도 오히려 남쪽을 압박하고,
결과적으로 불공정한 차별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제기도 있다.

이 모두 북이 남북교류협력을 하는 근본 이유는 '물질적 성과' 혹은 '댓가'라고 보는 견해에 속한다.



그러나 북한은 자본주의 사회인 남한과 달리 이윤창출을 목표로 움직이는 사회가 아니다.
즉 ‘사회주의적 이념’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사회이다.
‘사회주의적 이념’을 한마디로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다.
남북 협력사업에서의 ‘사회주의적 이념’은 때로는 ‘물질적 성과’일수도 있고,
때로는 그들이 말하는 ‘통일전선적 연대의 효과를 고려한 정치적 행위’일수도 있고
또 때로는 ‘역사적 평가와 대중적 시선’의 문제일수도 있다.
그러므로 매 상황마다 그들의 판단의 중심이 무엇인지를 남쪽에서 알아차리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다보니, 북은 양파처럼 속을 전혀 알 수 없는 집단이며,
북의 결정방향에 대해서는 늘 예측불허라는 평가가 더 객관적으로 들리기도 한다.


‘자본주의적 인식’과는 전혀 다른
‘사회주의 북한’ 사람들의 사고체계의 특성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그들이 우리와 어떻게 다른지를 찾아내고, <그 차이를 뛰어넘는 합의점 마련의 방도>를 마련하지 못하면
사실상 협력사업의 성사는 불가능하며, 더 나아가 남북화해협력의 길은 더 멀고 험란하게 느껴질 것이다.


이 글을 시작하는 이유는
지난 10년 동안 느낀 분단 60년을 훌쩍 넘으며 <협력사업>을 하게된
남과 북의 여러 풍경들을 스케치하고, 갈무리하며,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던 여러 가지 소회들을 축척하기 위함이다.


아직도 썩 자유롭지 않은 서로를 바라보는 시간, 이를테면 <주적>인지,
아니면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인지
그 애매모호한 헷갈림과 이질감을 염두에 두고, 다른 한편으로는 뜨거운 동포애적 정을 심장으로 느끼면서,
협력사업을 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은 그 어디메쯤 반드시 기록으로 남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일 것이다.


그동안 북한을 오고갈 때마다
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관념속의 <북한>과 실제 <북>의 사람들의 모습,
그리고 남북이 함께 창조해야할 새로운 길의 모습을 상상해 보곤했다.
지금도 그 새로운 길을 어찌어찌 개척해할지 명료한 것은 없다.
그러나 이렇게 에피소드를 적어보고, 사람들과 이야기하다보면,
어쩌면, 사람들이 훨씬 더 명확하게 나에게 길을 일러주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져보기도 하다.


각설하고, 남북관계도 가장 최악인 지금, 시간 있을 때, 그저 기록을 적어보자.
글 전체의 체계라든가, 짜임새라든가 그런 저런 고민을 하다보면 아마 끝까지 시작조차 하지 못할 것 같다.
그저 생각하는 대로 두서없이, 메모장을 만들어 두는 방식으로 시작할 수밖에 없겠다.
정리는 나중에! 좀 두서없어도 그게 시작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아직도 표현의 자유가 그다지 넓지 않은 상황에서,
미처 쓰지 못한 내 마음자리의 어수선함까지 이글을 읽는 네티즌들은 헤아려주지 않을까?

이글을 읽는 분들의 피드백을 기대하며, 하나씩 시작해보자.


신고
Posted by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