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기본합의서의 부속합의서들이 채택된 8차 남북고위급회담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의 제2장

 

남북 불가침의 이행과 준수를 위한 부속 합의서

 

 


남과 북은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의 '제2장 남북불가침'의 이행과 준수 및 군사적 대결상태를 해소하기 위한 구체적 대책을 협의한 데 따라 다음과 같이 합의하였다.


제1장 무력불사용

제1조 남과 북은 군사분계선 일대를 포함하여 자기 측 관할 구역 밖에 있는 상대방의 인원과 물자, 차량, 선박, 함정, 비행기 등에 대하여 총격, 포격, 폭격, 습격, 파괴를 비롯한 모든 형태의 무력사용 행위를 금지하며 상대방에 대하여 피해를 주는 일체 무력도발 행위를 하지 않는다. 

제2조 남과 북은 무력으로 상대방의 관할구역을 침입 또는 공격하거나 그의 일부, 또는 전부를 일시라도 점령하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 남과 북은 어떠한 수단과 방법으로도 상대방 관할 구역에 정규무력이나 비정규무력을 침입시키지 않는다. 

제3조 남과 북은 쌍방의 합의에 따라 남북 사이에 오가는 상대방의 인원과 물자. 수송 수단들을 공격, 모의공격하거나 그 진로를 방해하는 일체 적대 행위를 하지 않는다. 이 밖에 남과 북은 북측이  제기한 군사분계선 일대에 무력을  증강하지 않는 문제, 상대방에 대한 정찰활동을 하지 않는 문제, 상대방의 영해·영공을  봉쇄하지 않는 문제와 남측이 제기한 서울지역과 평양지역의 안전보장문제를 남북군사공동위원회에서 계속 협의한다.


제2장 분쟁의 평화적 해결 및 우발적 무력충돌 방지

제4조 남과 북은 상대방의 계획적이라고 인정되는 무력침공 징후를 발견하였을 경우 즉시 상대측에 경고하고 해명을  요구할 수 있으며 그것이 무력충돌로 확대되지 않도록 필요한 사전 대책을 세운다. 남과 북은 쌍방의 오해나 오인, 실수 또는 불가피한 사고로 인하여 우발적 무력충돌이나 우발적 침범 가능성을 발견하였을 경우 쌍방이 합의한 신호규정에 따라 상대측에 즉시 통보하며 이를 방지하기 위한 사전 대책을 세운다. 

제5조 남과 북은 어느 일방의 무력집단이나 개별적인 인원과 차량, 선박, 함정, 비행기 등이 자연재해나 항로미실과 같은 불가피한 사정으로 상대측 관할구역을 침범하였을 경우 침범측은 상대측에 그 사유와 적대의사가 없음을 즉시 알리고 상대측의 지시에 따라야 하며 상대측은 그를 긴급 확인한 후 그의 대피를 보장하고 빠른 시일 안에 돌려보내기 위한 조치를 취한다. 돌려보내는 기간은 1개월 이내로 하며 그 이상 걸릴 수도 있다. 

제6조 남과 북 사이에 우발적인 침범이나 우발적인 무력충돌과 같은 분쟁문제가  발생하였을 경우 쌍방의 군사당국자는 즉각 자기측 무장집단의 적대행위를 중지시키고  군사직통전화를 비롯한 빠른 수단과 방법으로 상대측 군사당국자에게 즉시 통보한다. 

제7조 남과 북은 군사분야의 모든  의견대립과 분쟁문제들을 쌍방 군사당국자가  합의하는 기구를 통하여 협의 해결한다. 

제8조 남과 북은 어느 일방이 불가침의 이행과 준수를 위한 이 합의서를 위반하는 경우 공동조사를 하여야 하며 위반사건에 대한 책임을 규명하고 재발방지대책을 강구한다.


제3장 불가침 경계선 및 구역

제9조 남과 북의 지상불가침 경계선과 구역은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에 규정한  군사분계선과 지금까지 쌍방이 관할하여온 구역으로 한다. 

제10조 남과 북의 해상불가침 경계선은 앞으로 계속 협의한다. 해상불가침구역은 해상불가침 경계선이 확정될 때까지 쌍방이 지금까지  관할하여온 구역으로 한다. 

제11조 남과 북의 공중불가침 경계선과 구역은 지상 및 해상 불가침 경계선과 관할구역의 상공으로 한다.


제4장 군사직통전화의 설치·운영

제12조 남과 북은 우발적 무력충돌과 확대를 방지하기 위하여 남측 국방부장관과 북측 인민무력부장 사이에 군사직통전화를 설치·운영한다. 

제13조 군사직통전화의 운영은 쌍방이 합의하는 통신수단으로 문서통신을 하는 방법  또는 전화문을 교환하는 방법으로 하며 필요한  경우 쌍방 군사당국자들이 직접 통화할 수 있다. 

제14조 군사직통전화의 설치·운영과 관련하여 제기되는 기술실무적 문제들은 이 합의서가 발효된 후 빠른 시일 안에  남북 각기 5명으로 구성되는 통신실무자접촉에서  협의 해결한다. 

제15조 남과 북은 이 합의서 발효 후 50일 이내에 군사직통전화를 개통한다.


제5장 협의·이행기구

제16조 남북군사공동위원회는 남북합의서 제12조와 '남북군사공동위원회 구성·운영에 관한 합의서' 제2조에 따르는 임무와 기능을 수행한다. 

제17조 남북군사분과위원회는 불가침의 이행과 준수 및 군사적 대결상태를 해소하기 위하여 더 필요하다고 서로 합의하는 문제들에 대하여 협의하고 구체적인 대책을 세운다.

 


제6장 수정 및 발효

제18조 이 합의서는 쌍방의 합의에 따라 수정·보충할 수 있다. 

제19조 이 합의서는 쌍방이 서명하여 교환한 날부터 효력을 발생한다.



                                                             1992년 9월 17일

                                     남 북 고 위 급 회 담          북 남 고 위 급 회 담
                                    남측 대표단 수석대표        북측 대표단      단장
                                      대    한    민    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총리      정원식          정무원 총리     연형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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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기본합의서의 부속합의서들이 채택된 8차 남북고위급회담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의 제1장

 

남북화해의 이행과 준수를 위한 부속합의서




 남과 북은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의 '제1장 남북화해'의 이행과 준수를 위한 구체적 대책을 협의한 데 따라 다음과 같이 합의하였다.


제1장 체제(제도)인정·존중

 제1조 남과 북은 상대방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체제(제도)를 인정하고 존중한다. 

 제2조 남과 북은 상대방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체제(제도)를 소개하는 자유를 보장한다. 

 제3조 남과 북은 상대방 당국의 권한과 권능을 인정·존중한다. 

 제4조 남과 북은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에 저촉되는 법률적, 제도적 장치의 개정 또는 폐기 문제를 법률실무협의회에서 협의·해결한다.


제2장 내부문제 불간섭

 제5조 남과 북은 상대방의 법질서와 당국의 시책에 대하여 간섭하지 아니한다. 

 제6조 남과 북은 상대방의 대외관계에 대해 간섭하는 행위를 하지 아니한다. 

 제7조 남과 북은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에 저촉되는 문제에 대하여서는 상대방에 그 시정을 요구할 수 있다.


제3장 비방·중상 중지

 제8조 남과 북은 언론·삐라 및 그 밖의 다른 수단·방법을 통하여 상대방을 비방·중상하지 아니한다. 

 제9조 남과 북은 상대방의 특정인에 대한 지명 공격을 하지 아니한다. 

 제10조 남과 북은 상대방 당국을 비방·중상하지 아니한다. 

 제11조 남과 북은 상대방에 대한 사실을 왜곡하지 않으며 허위사실을 조작·유포하지 아니한다. 

 제12조 남과 북은 사실에 대한 객관적 보도를 비방·중상의 대상으로 하지 아니한다. 

 제13조 남과 북은 군사분계선 지역에서 방송과 시각매개물(게시물)을  비롯한 그밖의 모든 수단을 통하여 상대방을 비방·중상하지 아니한다. 

 제14조 남과 북은 군중집회와 군중행사에서 상대방을 비방·중상하지 아니한다.


제4장 파괴·전복 행위금지 

 제15조 남과 북은 상대방에 대한 테러, 포섭, 납치, 살상을 비롯한 직접 또는 간접, 폭력 또는 비폭력 수단에 의한 모든 형태의 파괴·전복 행위를 하지 아니한다. 

 제16조 남과 북은 상대방에 대한 파괴·전복을 목적으로 하는 선전선동 행위를 하지 아니한다. 

 제17조 남과 북은 자기측 지역과 상대측 지역 및 해외에서 상대방의 체제와 법질서에 대한 파괴·전복을 목적으로 하는 테러 단체나 조직을 결성 또는 지원·보호하지 아니한다.


제5장 정전상태의 평화상태에로의 전환

 제18조 남과 북은 현 정전상태를 남북 사이의 공고한 평화상태로 전환시키기 위하여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와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을 성실히 이행·준수한다. 

 제19조 남과 북은 현 정전상태를 남북 사이의 공고한 평화상태로 전환시키기 위하여 적절한 대책을 강구한다. 

 제20조 남과 북은 남북 사이의 공고한 평화 상태가 이룩될 때까지 현 군사정전협정을 성실히 준수한다.


제6장 국제무대에서의 협력

 제21조 남과 북은 국제기구나 국제회의  등 국제무대에서 상호 비방·중상을 하지  않으며 민족의 존엄을 지키기 위하여 긴밀하게 협조한다. 

 제22조 남과 북은 국제무대에서 상대방의 이익을 존중하며 민족의 이익과 관련되는 문제들에 대하여 긴밀히 협의하고 필요한 협조조치를 강구한다. 

 제23조 남과 북은 민족공동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하여 재외  공관(대표부)이 함께 있는 지역에서 쌍방 공관(대표부) 사이에 필요한 협의를 진행한다. 

 제24조 남과 북은 해외동포들의 민족적 권리와 이익을 옹호하고 보호하며 그들 사이의 화해와 단합이 이룩되도록 노력한다.


제7장 이행기구

 제25조 남과 북은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의 '제1장 남북화해'에 관한 합의사항의 이행을 위하여 '남북화해공동위원회'를  구성·운영한다. '남북화해공동위원회' 구성·운영에 관한 합의서는 따로 작성한다. 

 제26조 '남북화해공동위원회'안에 '법률실무협의회'와 '비방·중상중지실무협의회'를 두며 그 밖에 쌍방이 합의하는 필요한 수의 실무협의회를 둔다. 실무협의회 구성·운영에 관한  합의서는 '남북화해공동위원회'에서 별도로  작성한다.


제8장 수정 및 발효

 제27조 이 부속합의서는 쌍방의 합의에 따라 수정·보충할 수 있다. 

 제28조 이 부속합의서는 쌍방이 서명하여 교환한 날부터 효력을 발생한다. 


부기: 북측이 제기한 '남과 북은 국제기구들에 하나의 명칭,  하나의 의석으로 가입하기 위하여 노력한다.', '남과 북은 국제회의를 비롯한 정치행사들에 전민족을 대표하여  유일 대표단으로 참가하기 위하여 노력한다', '남과 북은 제3국이  상대방의 이익을 침해하는 일체 행위에 가담하거나 협력하지 않는다.', ' 남과 북은 다른 나라들과 맺은 조약과  협정들 가운데서 민족의 단합과 이익에 배치되는 것을 개정 또는 폐기하는 문제를 법률실무협의회에서 협의 해결한다'는 조항들은 합의에 이르지 못했으므로 앞으로 계속 토의한다. 



                                                                 1992년 9월 17일


                                          남 북 고 위 급 회 담         북 남 고 위 급  회 담
                                         남측대표단 수석대표        북측 대표단  단    장
                                          대    한    민    국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국무총리    정원식          정무원  총리 연형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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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


남과 북은 분단된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염원하는 온 겨레의 뜻에 따라, 7·4남북공동성명에서 천명된 조국통일 3대원칙을 재확인하고, 정치 군사적  대결상태를 해소하여 민족적 화해를 이룩하고, 무력에 의한 침략과 충돌을 막고 긴장 완화와 평화를 보장하며, 다각적인 교류·협력을 실현하여 민족공동의 이익과 번영을 도모하며, 쌍방 사이의 관계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는 것을  인정하고, 평화 통일을 성취하기 위한 공동의 노력을 경주할 것을 다짐하면서, 다음과 같이 합의하였다.


          제1장 남북화해

제1조 남과 북은 서로 상대방의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한다.

제2조 남과 북은 상대방의 내부문제에 간섭하지 아니한다.

제3조 남과 북은 상대방에 대한 비방·중상을 하지 아니한다.

제4조 남과 북은 상대방을 파괴·전복하려는 일체 행위를 하지 아니한다.

제5조 남과 북은 현정전상태를 남북 사이의 공고한 평화상태로 전환시키기 위하여 공동으로 노력하며 이러한 평화상태가 이룩될 때까지 현군사정전협정을 준수한다.

제6조 남과 북은 국제무대에서 대결과 경쟁을 중지하고 서로 협력하며 민족의 존엄과 이익을 위하여 공동으로 노력한다.

제7조 남과 북은 서로의 긴밀한 연락과 협의를 위하여 이 합의서 발효 후 3개월 안에  판문점에 남북연락사무소를 설치·운영한다.

제8조 남과 북은 이 합의서 발효 후 1개월 안에 본회담 테두리 안에서 남북정치분과위원회를 구성하여 남북화해에 관한 합의의 이행과 준수를 위한 구체적 대책을 협의한다.


          제2장 남북불가침

제9조 남과 북은 상대방에 대하여 무력을 사용하지 않으며 상대방을 무력으로 침략하지 아니한다.

제10조 남과 북은 의견대립과 분쟁문제들을 대화와 협상을 통하여 평화적으로 해결한다.

제11조 남과 북의 불가침 경계선과 구역은 1953년 7월 27일자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에 규정된 군사분계선과 지금까지 쌍방이 관할하여 온 구역으로 한다.

제12조 남과 북은 불가침의 이행과 보장을 위하여 이 합의서 발효 후 3개월 안에  남북군사공동위원회를 구성·운영한다. 남북군사공동위원회에서는 대규모 부대이동과 군사연습의 통보 및 통제문제, 비무장지대의 평화적 이용문제, 군인사교류 및 정보교환  문제, 대량살상무기와 공격능력의 제거를 비롯한  단계적 군축 실현문제, 검증문제  등 군사적 신뢰조성과 군축을 실현하기 위한 문제를 협의·추진한다.

제13조 남과 북은 우발적인 무력충돌과 그 확대를 방지하기 위하여 쌍방 군사당국자 사이에 직통 전화를 설치·운영한다.

제14조 남과 북은 이 합의서 발효 후 1개월 안에 본회담 테두리 안에서 남북군사분과위원회를 구성하여 불가침에 관한 합의의 이행과 준수 및 군사적 대결상태를 해소하기 위한 구체적 대책을 협의한다.


          제3장 남북교류·협력

제15조 남과 북은 민족경제의 통일적이며 균형적인 발전과 민족전체의 복리향상을 도모하기 위하여 자원의 공동개발, 민족 내부  교류로서의 물자교류, 합작투자 등  경제교류와 협력을 실시한다.

제16조 남과 북은 과학·기술, 교육, 문화·예술, 보건, 체육, 환경과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 및 출판물을 비롯한 출판·보도 등 여러분야에서 교류와 협력을 실시한다.

제17조 남과 북은 민족구성원들의 자유로운 왕래와 접촉을 실현한다.

제18조 남과 북은 흩어진 가족·친척들의 자유로운 서신거래와 왕래와 상봉 및 방문을 실시하고 자유의사에 의한 재결합을 실현하며, 기타 인도적으로  해결할 문제에 대한 대책을 강구한다.

제19조 남과 북은 끊어진 철도와 도로를 연결하고 해로, 항로를 개설한다.

제20조 남과 북은 우편과  전기통신교류에 필요한 시설을  설치·연결하며, 우편·전기통신교류의 비밀을 보장한다.

제21조 남과 북은 국제무대에서 경제와 문화 등 여러분야에서 서로 협력하며 대외에 공동으로 진출한다.

제22조 남과 북은 경제와 문화 등 각  분야의 교류와 협력을 실현하기 위한 합의의 이행을 위하여 이 합의서 발효 후  3개월 안에 남북경제교류·협력공동위원회를 비롯한  부문별 공동위원회들을 구성·운영한다.

제23조 남과 북은 이 합의서 발효 후 1개월 안에 본회담 테두리 안에서 남북교류·협력분과위원회를 구성하여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의 이행과 준수를 위한 구체적  대책을 협의한다.


          제4장 수정 및 발효

제24조 이 합의서는 쌍방의 합의에 의하여 수정·보충할 수 있다.

제25조 이 합의서는 남과 북이 각기 발효에 필요한 절차를 거쳐 그 문본을 서로 교환한  날부터 효력을 발생한다.



1991년 12월 13일

           남 북 고 위 급  회 담                   북 남  고 위 급  회  담
         남측 대표단 수석 대표                  북 측  대 표 단  단  장
               대    한     민    국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국 무 총 리 정원식                     정 무 원 총 리 연형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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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남북기본합의서가 탄생하기 전, 남과 북 정권은 어떤 위기 상황 속에 있었는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제 남과 북이 각각 자신이 맞이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 남북기본합의서를 이용했는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전술적 행동의 개시, 남북 대화

 

당시 남한 정권은 <남북기본합의서>가 남측의 제안으로 시작되었다고 공식적으로 밝히고 있다. 1992년 통일원 자료에는 “1988년 12월 18일 강영훈 총리가 북한 정무원 총리 연형묵에게 보낸 서한을 통해 「남북고위당국자회담」을 개최하자고 제의하였고, 이에 대해 1989년 1월 16일 연형묵 총리가 「남북고위 정치․군사회담」개최를 수정․제의하면서, 이를 위한 예비회담 개최를 수락함에 따라 성립되었다”라고 적시되어 있다.[각주:1] 강영훈 총리의 서신 제안 이전에도 1988년 6월 3일 이현재 국무총리 명의로 ‘남북고위당국자회담’을 제의했었고,[각주:2] 1988년 7월 7일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7․7 대통령 특별선언>을 노태우 대통령이 발표해 사전 분위기 조성에 나선 상태였다. 남북대화를 선제적으로 제의했다는 점은 어떤 식으로든 정치적 정당성에서 우위를 줄 수 있는 부분이었다. 사실 이미 1980년대 초반부터 가동되어 왔던 남북 간의 비밀 대화 라인을 통해 기본합의서 논의가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남한 정권은 이 부분을 강조한다.

 

남북 회담을 제의함에 있어 남한 정부가 또한 중요하게 방점을 찍었던 부분은 남북 회담권의 정부 독점이었다. 즉 “대북제의 및 접촉 창구는 ‘국가적 차원에서 정부로 일원화되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었다.[각주:3] 정부가 남북 회담의 창구를 독점한다는 것은 그리 새로울 것이 없는 일이었지만, 당시의 상황에서 고려한다면 이는 국내적으로 핵심적인 사안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당시 남한에서는 민주화의 열기를 타고 통일 논의가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1988년 서울대학교 총학생회는 독자적으로 김일성종합대학 학생위원회에 남북학생회담을 제의했고, 전대협 대표 임수경과 전민련 대표 문익환 목사의 방북 사건, 통일운동 단체들의 약진 등은 남한 정권에게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남북 회담을 제안하면서 협상 통로의 정부 독점을 강조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국내적으로 정권에 도전적인 세력을 공식적으로 압박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정부가 나서니 민간은 가만히 있으라’는 명제를 근거로, 정권에 도전적인 세력에 압력을 가하는 공안정국을 전개한 것이다. 이런 과정 속에서 통일민주당과 신민주공화당이 민정당과 합당해,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을 탄생시키는 이른바 3당합당을 달성하며, 당시 남한 정권에 가장 문제였던 여소야대 정국을 극복한다. 이로써 남한의 집권 세력은 5공 중간평가에 대한 압력과 군사정권의 후신이라는 이미지로부터 벗어나는 데 유리한 조건을 형성한다.

 

‘맞잡은 손, 분단의 벽을 넘다!’ 1989년 8월15일 임수경씨와 문규현 신부가 손을 맞잡고 판문점을 걸어서 넘어오고 있다.(사진출처.한겨레)

 

또한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와 남북 회담의 성사라는 동인이 동반된 북방외교는 큰 성과를 내며 남한 정권에게 닥친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는 데 돌파구 역할을 한다. 동구 사회주의권 국가들과 급속한 수교를 진행시켜나가고, 1991년 4월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노태우 대통령이 만난 제주 정상회담에서는 고르바초프로부터 남한의 UN가입 지지의사를 얻어내고, 1992년 3월 한․러 외무장관 회담에서는 북한의 핵사찰을 용인하는 러시아의 협력 의사를 확인하는 등 북방외교의 결과물은 남한 정부가 단기간에 이뤄낸 큰 외교적 성과였다. 결과적으로 <남북기본합의서> 체결 국면은 당시 남한 정권으로 하여금 위기 극복의 돌파구로서의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남측의 제의에 화답하는 형식으로 북한은 <남북기본합의서> 협상 국면으로 진입한다. 북한은 협상 과정에서 다양한 형태의 협상전략을 구사하며 이른바 밀고 당기기를 진행하지만 어쨌건 꾸준히 회담을 지속시킨다.[각주:4] 그런데 북한은 <남북기본합의서> 협상 국면으로 진입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정치․군사 고위급회담과 더불어 민간급 교류 역시 중요하게 주장해왔다.[각주:5] 북한에게 있어 통일전선전술은 전통적으로 중요한 대남 사업기조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이다. 특히 남한의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 및 각계각층 민중들을 대상으로 제휴하는 하층 통일전선전술이 중심이었고,[각주:6] 이 전술은 남과 북이 대화하는 자리에는 북한이 늘 가지고 등장하는 논의의 아이템이었다. 그런데 남북고위급회담을 준비하기 위한 3차 예비회담에서 북한이 보여준 통일전선전술에 대한 입장 변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89년 10월 12일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열린 3차 예비회담에서 북측은 방북 건으로 수감되어 있었던 문익환 목사, 문규현 신부, 임수경의 석방을 요구했다. 이에 남측은 허가 없는 방북은 남한 실정법 위반이며 이를 처벌하는 것은 남한 내부의 문제라고 주장하였다.[각주:7] 이를 두고 매우 격렬한 토론이 벌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석방’이라는 북측의 기본 입장에 대한 ‘불가’라는 남측의 명백한 거부라는 논의의 구도에서 본다면, 3차 예비회담이 결렬되는 것이 예측 가능한 시나리오였을 것이다. 그런데 예상을 뒤엎고 3차 예비회담은 다음 예비회담의 날짜를 정하는 등 성과를 보이며 “좋은 분위기”에서 마무리된다.[각주:8] 북한의 입장에서는 북한의 전통적인 대남 전략인 통일전선전술보다 불가침 조약 체결, 적어도 회담 기간만큼은 군사적 위협을 줄일 수 있는 ‘회담의 지속’을 바랐다고 볼 수 있다.

 

반대로 북한은 군사 분야의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지속적으로 집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특히 1990년 1월 30일에 있었던 6차 예비회담에서 팀 스피리트 훈련 중지에 대해서 먼저 토의하자고 제안하고, 이 자리에서 대전차용 방벽 철거까지 주장하는 적극성을 보인다. 결과적으로 회담이 결렬된 것은 아니지만 다음 회담 날짜를 잠정적으로 합의하는 데에서 그친다.[각주:9] 또한 1990년 2월 8일 팀 스피리트 훈련을 이유로 2월 22일에 개최하기로 한 11차 남북국회회담 준비회담 개최를 거부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북한은 지속적으로 주장했던 불가침협정에 대한 내용을 <남북기본합의서>에 포함시킬 수 있게 된다. 비록 미국과의 불가침협정에까지 이르지는 못했지만, 1989년 미국 정부에 제출되고 1990년 공식 발표된 ‘동아시아 전략구상(EASI, East Asia Security Initiative)’ 따르면, 동아시아 지역의 새로운 안보 수요에 맞춰 미군 지상군과 공군 병력 일부를 단계적으로 철수시키기로 되어 있었으며 여기에는 주한미군도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계획대로 주한미군의 철수가 진행된다면 북한으로서는 군사적 위협을 덜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할 수 있었다. 게다가 <남북기본합의서>와 거의 동시에 진행된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 및 주한미군의 전술핵 철수 계획까지를 포함해서 고려한다면 북한이 느끼는 군사적 위협은 꽤 많이 감소되었을 것이고, 이는 곧 경제 분야로 더 많은 자원을 배분할 수 있는 기회 요소가 되었을 것이다.

 

북한은 협상의 성과물 자체, 즉 <남북기본합의서>에 자신의 의도인 군사적 안보 위협 축소에 대한 내용을 포함시켰다. 따라서 북한의 협상 전략이 시간 벌기와 측면 돌파의 차원에서만 진행된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은 제반의 상황이나, 이후 <남북기본합의서>보다 더 적극적으로 군사적 안보 위협을 보장받을 수 있는 북미 직접 대화 국면이 열리자 바로 회담의 테이블을 바꾼 것은 북한의 전략을 추측할 수 있게 해준다.

 

남북기본합의서? 신사협정일 뿐이다

 

<남북기본합의서>가 남과 북의 집권 세력이 고조된 위기 국면을 측면으로 우회해서 돌파하려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면, 합의서 체결 이후 결과물을 바라보는 남과 북의 시선은 다를 수밖에 없으며 합의서의 이행이 어려워지는 것을 예측할 수 있다. 이런 관점으로 본다면 남한 집권 세력에게 있어 <남북기본합의서>는 화해와 협력, 통일을 위한 합의가 아닌 국내 정치적 안정을 위한 합의가 된다. 그리고 이것은 합의서 체결 이후 남한이 내놓는 <남북기본합의서>에 대한 태도와 발언에서 유추해볼 수 있다.

 

<남북기본합의서> 국면을 통해 남한의 집권 세력은 정권의 정당성 확보와 외교적 업적의 확보라는 1차적인 목표를 달성했다. 하지만 <남북기본합의서>를 현실화시키는 국면에서는 태도가 변한 것처럼 보인다. 우선 법적 성격의 문제이다. <남북기본합의서>는 남한과 북한 상호 간에 맺은 합의로 이것이 법적인 구속력을 지니려면 조약으로 인정될 필요가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북한은 자국법의 절차에 따라 <남북기본합의서>를 조약으로 비준하고 승인하는 공식적인 작업을 거쳤지만, 남한에서는 그 과정이 생략되었다. 남한 정부는 최초 <남북기본합의서>를 법적 효력이 없는 신사협정(Gentleman's Agreement)이라고 규정했다가, 이후 조약이 아니라는 입장을 분명하게 밝혔다.[각주:10] 이는 대법원과 헌법재판소 판례로 더욱 힘을 얻게 된다.

 

남북합의서는 남북한 당국이 각기 정치적 책임을 지고 상호 간에 그 성의 있는 이행을 약속한 것이기는 하나 법적 구속력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이를 국가 간의 조약 또는 이에 준하는 것으로 볼 수 없고, 따라서 국내법과 동일한 효력이 인정되는 것도 아니다.(대법원 1999.7.23)[각주:11]

 

남북합의서는 한민족 공동체 내부의 특수관계를 바탕으로 한 당국 간 합의로서 남북 당국의 성의 있는 이행을 상호 약속하는 일종의 공동성명 또는 신사협정에 준하는 성격을 가짐에 불과하다. (헌재 2000.7.20)[각주:12]

 

우리나라의 법제상 사법부의 판례는 법원(法源)이 될 수 없으므로 법적 판단에 있어 판례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의 판례가 정치적인 고려나 판단에서 벗어나 법리적인 측면에서만 검토되지 않는다는 점과, 그로 인해 대법원과 헌재의 판례가 가지는 정치적 권위가 엄연히 존재한다는 측면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남북기본합의서>는 체결 과정에서 남한 집권 세력의 위기 극복이라는 목표를 달성시켜주었지만, 정작 남북 관계에서는 자신의 역할을 수행할 기회를 잃었다. 곧이어 발생한 북미 간 핵대결은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남북 관계를 전개시켰고, 그 결과 북미 제네바 합의라는 다른 상황을 연출한 것이다. 이것은 마치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이 남한에서 박정희의 유신 헌법 개정에 도움을 준 이후에는 폐기된 것과 유사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1994년 10월 21일 체결된 북미 제네바합의

 

 

남북기본합의서? 미국과 불가침조약을 맺기 위한 한 계단일 뿐이다

 

북한도 상황은 비슷했다. <남북기본합의서>의 핵심 요지 가운데 하나는 남북 관계에 있어 당사자 주의를 강조했다는 점이다. 이는 북한의 전통적인 주장과도 일맥상통하는 측면이 있다.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이 기조였던 <7․4남북공동성명>에서도 나타나지만, 북한은 남북 관계에서 외세의 개입, 특히 미국의 개입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적어도 체제 경쟁이 진행된 1970년대만큼은 외세 배격을 중심에 놓는다. 하지만 북한의 핵시설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고 이에 따른 경색 국면이 펼쳐지자 북한은 <남북기본합의서>에 기반한 해결보다는 북미 간 협상으로 선회한다.

 

<남북기본합의서> 협상 국면에서 북한은 꾸준히 한반도 비핵지대화에 대한 주장을 강조했으며, 이는 남한을 통해 미국을 간접적으로 압박하려는 전술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남북기본합의서> 시스템을 가동해보기도 전에 북한은 미국을 상대로 협상에 들어간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남북기본합의서>를 공식화시키는 작업을 구체화하기는 하였지만 현실에 있어서는 이를 실천할 의지가 강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 역시 <남북기본합의서> 국면을 당면한 정권의 위기 극복 우회 수단으로 여겼다는 증거로 볼 여지가 있을 것이다.

   

쓸려고 만든 문서인가, 아니면 만드는 과정이 필요했던 문서인가

 

남북 관계를 일종의 국제 관계로 파악한다면, 남한과 북한이 갈등 국면에서 벌이는 체제 경쟁과 화해 국면에서 벌이는 협상은 민족적 유대감이나 도덕적 규범의 잣대로만 보기 힘든 측면이 있다. 오히려 남북 관계를 국제 관계적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이론적인 측면에서 좀더 쉽게 설명되는 부분이 생겨난다.

 

<남북기본합의서>를 둘러싼 남한과 북한의 행동은 전술적인 차원에서 전개되었다. 각자 집권 세력이 당면해서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을 풀기 위해 시간을 벌거나,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한 전술적인 측면 돌파의 성격이 강했다. 남한은 신장된 경제력을 바탕으로 국내 정치에서 획득하지 못했던 정당성을 확보하고, 정치적 반대 세력을 견제하고, 가시적인 치적을 쌓아 정권 재창출이라는 현실적인 목표를 달성하는 데 <남북기본합의서> 국면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북한의 경우 증가된 안보 위협에 맞서 시간을 확보하며 현실적인 이득을 챙기기 위해 <남북기본합의서> 국면을 적절하게 활용했다. 문제는 이들의 현실적인 목표가 달성되자 곧바로 다른 종류의 현실적인 목표로 다시 이동했다는 점이다. 어쩌면 <남북기본합의서>라는 국면을 민족적인 관점, 통일의 관점에서 남과 북의 집권 세력이 접근했다면 이런 결과를 맞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1. 1) 통일원, 「남북기본합의서」해설(서울: 통일원 통일정책실, 1992), 8쪽. [본문으로]
  2. 2) 양무진, 「북한의 대남협상전략 유형」(경남대학교대학원 정치외교학과 박사학위논문, 2001), 108쪽. [본문으로]
  3. 3) 배광복, 「남북관계의 경로의존과 구성-7․4 남북공동성명에서 남북기본합의서 채택까지 남북회담분석」(고려대학교대학원 정치외교학과 박사학위논문, 2008), 223쪽. [본문으로]
  4. 4) 양무진은 이 시기의 북한이 대남협상전략 가운데 ‘절충형 타결’ 유형이 6건으로 가장 많았고, 북한이 일방 양보한 것 1건, 대안제시형 타결 1건, 의견일치형 타결 3건이었다고 분석했다. 결렬의 경우는 남측의 일방적 거부가 3건, 북측의 일방적 거부가 4건, 전제조건형 결렬이 4건이 있었지만 ‘완만한 합의 추구’ 유형에 가깝다고 정리하고 있다. 양무진, 앞의 논문, 143~145쪽. [본문으로]
  5. 5) “가까운 시일안에 평양에서 북과 남의 각 당, 각 파, 각계각층의 의사를 대표할수 있는 지도급인사들로 북남정치협상회의를 가질것을 정중히 제의합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남조선의 민주정의당, 평화민주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의 총재들과 김수환추기경, 문익환목사, 백기완선생을 평양에 초청하는바입니다.” 김일성, “신년사(발취) 1989년 1월 1일”, 「련방제조국통일방안에 대하여」(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96), 365쪽. [본문으로]
  6. 6) 따라서 제 사회단체로 구성되는 범민련(조국통일범민족연합)이나 대학생, 청년단체들로 구성되는 범청학련(조국통일범민족청년학생연합)은 통일전선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며, 통일전선 차원에서 추진되는 범민족대회와 같은 사업들 역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 제성호, 「남북한 관계론」(파주: 집문당, 2010), 121쪽. [본문으로]
  7. 7) 양무진, 앞의 논문, 115쪽. [본문으로]
  8. 8) 양무진, 위의 논문, 115쪽. [본문으로]
  9. 9) 양무진, 위의 논문, 117~118쪽. [본문으로]
  10. 10) 도회근, 「남북한관계와 헌법」(울산: 울산대학교출판부, 2009), 116쪽 [본문으로]
  11. 11) 이장희․유하영․문규석, 「남북 합의 문서의 법적 쟁점과 정책과제」(서울: 아시아사회과학연구원, 2007), 124쪽. [본문으로]
  12. 12) 이장희․유하영․문규석, 위의 책, 124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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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형태의 남북 간 합의문서, 남북기본합의서

 

1991년 12월 13일 대한민국 국무총리 정원식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무원총리 연형묵은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합의서>(이하 <남북기본합의서>)에 서명을 한다. 이는 사실상 남과 북이 서로의 관계를 법제도적으로 규율할 것을 합의한 최초의 공식 문서였다. <남북기본합의서> 이전에 남북 간을 법제도적으로 규정하는 문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53년 체결된 정전협정은 남북 관계를 규율하는 문서로 존재했다. 하지만 이것은 서명 당사자로 남한이 빠져 있는 제한적인 것이었다.[각주:1] 반면 <남북기본합의서>는 1980년대 남과 북의 공식․비공식 협상 과정에서 등장했던 다양한 요구들이 공식적인 회담의 틀 속에서 수차례 논의되고, 합의서의 형태로 도출된 것이었다.[각주:2] 게다가 <남북기본합의서>의 체결 이후 북한에서는 이 문서를 김일성 주석의 비준과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의 승인이라는 절차를 거쳐 공식화 과정을 마쳤다.[각주:3] 남한의 경우, 북한처럼 공식적인 승인 절차를 거치지는 못했지만 <남북기본합의서>의 법적인 근거를 인정하는 견해가 다수인 것으로 보인다.[각주:4] 이러한 일련의 과정과 평가를 종합해볼 때, <남북기본합의서>는 “남북 관계 전반을 규율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이행․실천은 진정한 의미의 남북화해․협력시대를 개막할 수 있는 최고의 준거틀이 될 수 있다”라고 평가된다.[각주:5]

 

1991년 12월13일 남북고위급회담에서 남북의 대표자들이 <남북기본합의서>에 서명하고 합의서를 교환하고 있다.

 

그러나 <남북기본합의서>는 서명이 되자마자 사문화되었다. 합의서를 실제 가동해보기도 전에 터진 북핵 문제로 한반도는 전쟁 위기로 넘어갔다. 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협상에서 주요 당사자가 남북이 아닌 북미였으며, 이후 북은 일관되게 한반도 평화의 문제를 미국과 협상하려는 노력을 지속한다. 얼마 후 북에서는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고 고난의 행군기로 접어들었으며, 남에서는 남북문제에 있어 보수적 시각을 견지했던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다. 결과적으로 남과 북은 2000년 남북정상회담까지 무관심과 대결 양상을 반복했고, <남북기본합의서>는 가끔씩 정치적 레토릭으로 등장시키는 것 말고는 용도가 없었다. 여기에 2000년과 2007년에 있었던 남북 정상회담과 그에 따른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이 그나마 <남북기본합의서>의 정치적 위상까지 역전시킨다.

 

예기치 못한 다양한 사건들로 인해 <남북기본합의서>가 체결 직후 그 기능을 하지 못했던 것까지는 이해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태가 화해 국면으로 접어들었을 때, 왜 어렵게 마련된 <남북기본합의서>를 꺼내지 않고 남과 북은 <6․15공동선언>으로 나아갔을까? 재미있게도 이와 같은 일은 남북관계에서 처음이 아니다. <7․4남북공동성명>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1970년대 초반 당시 남과 북 정권의 최고위급 인사들을 채널로 해서 탄생한 <7․4남북공동성명>은 야심차게 발표가 되었지만, 공식화되기도 전에 사문화되었다. 그리고 남과 북은 또 어렵게 <남북기본합의서>를 새롭게 만든다. 왜 남과 북은 만들어 놓은 것을 쓰지도 않고, 어렵게 새로운 것을 또 다시 만들며, 그것들의 서명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창고에 쳐 박는 것일까?

 

머리를 아주 깨끗하게 비우고 맨 밑바닥부터 다시 한 번 생각을 해본다. 과연 남과 북의 정책 결정자들은 통일을 전제로 한 남북 합의에 의지가 있었던 것일까? 남북 협상을 일종의 국내외적으로 처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정치적 카드로 활용한 것은 아닐까? 그리고 원하던 목표를 달성한 이후 효용가치가 사라진 남북 협상 카드를 부담 없이 버렸던 것은 아닐까? 우선 <남북기본합의서>가 탄생하기 직전의 남과 북의 상황을 살펴보기로 하자.

 

 

남쪽의 사정, 정치적 위기

 

<남북기본합의서>를 남북 관계에서 대화와 협상을 통한 관계 증진의 성과물로 볼 것인지, 아니면 남과 북이 정권을 유지하는 데 있어 일시적으로 사용하는 정치적 카드의 부산물인지 여부는, 먼저 남과 북 정권이 당시 어떻게 현실을 인식하고 있었는지에 대해 보는 것에서 시작될 것이다.  

 

<표 > 남한과 북한의 국내외 정치경제 상황[각주:6]

 

남한

북한

정치

국내

*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 폭발 / 6․29 선언과 대통령 직선제 실시 / 군사정권 전체가 실각하지 않았지만 정통성 상실(5공 청산에 대한 요구 증대)

* 여소야대 정국

* 민주화 과정 속에서 통일 논의의 급속한 진전(학생운동, 통일운동의 급진화 및 대중화)

* 김일성에서 김정일로의 정권의 이양

* 기술관료와 경제전문가 등의 테크노라트가 새로운 집권 세력으로 부상

국외

* 신 냉전 체제의 붕괴 / 중국, 소련을 위시한 공산권 국가들과의 수교 기회 발생(1988년 서울올림픽에 공산권 국가들이 대거 참가)

* 신 냉전 체제의 붕괴 / 안전망 역할을 하던 중국과 소련이 남한과 수교

* 공산권 대부분이 붕괴함에 따라 미국 군산복합체의 마케팅 대상의 축소 / 북한, 쿠바, 리비아 등 사회주의권 국가들이 미국 군산복합체의 직접 타켓이 됨

* 남한에 흡수통일될 수 있다는 불안감 증가

경제

국내

* 높은 수준의 경제 성장 1986~1988년 연평균 성장률 12% / 국제수지의 흑자 전환, 1987년 98억 달러 1988년 142억 달러 흑자 달성)

* 경제의 마이너스 성장 1985~1989년 연평균 마이너스 2~3% 성장, 1990년 -3.7%, 1991년 -5.2%, 92년 -7.7%

* 서울올림픽에 대응한 청년학생축전에 무리한 역량 투입

국외

* 유리한 경제 여건(저유가, 저환율, 저금리)

* 새로운 투자처와 시장에 대한 필요 증가

* 동구 공산권 몰락으로 인한 무역 축소

* 중국, 소련의 지원 축소

* 미국의 경제봉쇄

 

남한은 우호적인 경제 환경(저환율, 저유가, 저금리)을 발판으로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달성한다. 이는 남한 정권의 입장에서 보자면 정권 유지 차원에서 유리한 조건이 형성된 것이었다. 그러나 정치 분야에서는 반대의 길을 걷는다. 군사 쿠데타로 집권에 성공한 제5공화국은 1987년 폭발적으로 분출한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6․29선언에 이은 개헌(대통령 직선제)을 통해 정권 재창출에는 성공하지만, 이는 대통령 선거에 나선 야권 후보들 사이의 후보 단일화 실패에 따른 반사효과였다고 볼 수 있다.[각주:7] 여기에 대통령 선거 이듬해인 1988년에 치러진 제13대 국회의원총선거에서 최초로 여소야대 정국이 형성되어 집권 세력에게는 불리한 정치적 상황이 조성되었다.[각주:8] 전반적으로 높아진 민주화의 요구는 사회 각 분야에서 분출되기 시작했고 노동운동, 학생운동, 통일운동의 범위가 넓어지고 수위는 깊어졌다. 남북 관계와 직접 연계되는 통일운동에서, 1987년 6월 항쟁에서 대중투쟁의 주역이었던 학생운동 세력은 전국적인 조직인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을 건설하고 이를 발판으로 본격적인 통일운동에 나선다. 이와 더불어 재야 세력들은 각종 통일운동 단체를 결성하고 독자적으로 북과 대화를 시도한다.[각주:9]

 

남한 정권은 이런 정권의 위기 극복을 위해 한쪽으로는 공안정국을 조성해 정권 위협 세력에 압력을 가한다.[각주:10] 하지만 다른 한쪽으로는 1988년 7월 7일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하면서 이후 성공적인 북방정책이라는 업적으로 위기를 극복하려는 시도를 펼친다.[각주:11]

 

사실 북방정책은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시도된 것이었다. 군사 쿠데타라는, 정권의 정당성에 오점이 있었던 남한 정권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올림픽이라는 국제적 이벤트 개최를 추진한다. 그런데 당시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의 관건은 사회주의권 국가들의 참가였다. 1980년대 신 냉전체제의 가동은 올림픽 참가에서 극명하게 증명이 되었기 때문이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 서방세계 국가들은 대거 참가하지 않았고, 그에 대한 복수(?)로 1984년 LA올림픽에는 사회주의권 국가들이 대거 불참했다. 따라서 1988년 서울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는 사회주의권 국가들이 얼마나 참여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그로 인해 1981년 서울올림픽 유치위원장, 1983~1986년까지 서울올림픽 조직위원장을 담당했던 노태우는 사회주의권 국가들의 올림픽 참여에 공을 들이게 되었고, 이것이 사실상 북방정책의 시작이었다.[각주:12] 그런데 사회주의권 국가들과 협상을 추진하는 가운데, 노태우는 북한이라는 요소를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사회주의권 국가들을 대상으로 한 북방정책을 성공시킬 수 있는 핵심적인 키포인트에는 같은 사회주의권 국가인 북한에 대한 안정적인 컨트롤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남북 관계의 개선이 필요하다는 점으로 연결되었다. 이는 노태우가 이후 대통령 자리에 오르면서 실시하게 되는 북방정책의 컨셉이 된다. 여기에 새로운 투자처와 시장을 찾던 남의 자본의 이해가 결합된다. 북방정책을 성공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사회주의권 국가들에 대한 투자였는데, 때마침 시장과 투자를 확대하려던 남한 내 자본이 이 프로젝트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게 된다. 이렇게 실탄이 확보된 북방정책은 탄력을 받는다.

 

88서울올림픽. 올림픽의 성공개최를 위해 노태우는 북방정책을 펼쳤고 사회주의 국가들이 참여하였지만 북한은 끝내 불참하였다.

 

남한 정권은 국내적으로 집권 세력에게 요구되는 정통성 시비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그로 인해 끊임없이 국내 정치 세력들에게 압력을 받았다. 그리고 이런 위기 상황을 탈피하기 위해 신장된 경제력을 바탕으로 공세적인 북방외교를 펼쳐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해야 했다. 그리고 다시 이를 위해 남북 관계 개선을 하나의 돌파구로 상정한다.

 

 

북쪽의 사정, 경제적 위기

 

북한의 경우 남한에 비해 정치적인 위기 상황은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70년대 김일성에서 김정일로의 정권 이양이 단계적으로 진행되었으며, 1980년대에는 김정일의 집권이 안정화 국면에 접어든 것으로 보인다.[각주:13] 하지만 경제적인 분야에서는 전체적으로 위기 국면으로 접어든다고 볼 수 있다.

 

1960년대 남한을 능가하는 경제력을 보유했고, 1970년대까지만 해도 남한과 엇비슷한 수준의 경제력을 가졌던 북한은, 1980년대로 들어오면서 경제 분야에서 마이너스 성장을 경험하게 된다. 이와 관련해 다양한 분석이 있겠으나 여기에서는 급격히 증가한 군비 문제를 중심으로 살펴보자.[각주:14]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닉슨 독트린으로 대변되는 데탕트 분위기는 북한에게 새로운 위협 요소로 등장한다. 냉전이 해빙 무드로 돌아서면서 미국과 중국의 관계 개선, 소련의 수정주의 노선 채택 등은 중국과 소련으로부터 북한으로 들어오는 군사 원조의 축소를 의미했다. 이로 인해 북한은 어쩔 수 없이(?) 주체적인 군사 노선을 수립할 수밖에 없었다. 군사적 자립, 즉 군비 증강 압력이 커진 것이다. 1965년 예산지출 대비 국방비의 비중이 8% 정도였던 북한은 1967년에는 30%까지 그 비중이 급격하게 증가한다.[각주:15] 그리고 이렇게 급격하게 증가한 국방비는 경제 분야에 투입될 예산의 상당 부분을 잠식했을 것이고, 이것은 북한 경제를 크게 흔드는 요소로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1980년 미국에서 레이건(Ronald Wilson Reagan)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난 이후, 그 이전까지 형성되어 왔던 데탕트 분위기가 뒤집어지는 신 냉전 체제가 구축된다. 데탕트 기간에는 미중 수교로 인한 중국의 동맹이탈 가능성에 군사적 위협을 느꼈던 북한이지만, 신 냉전 체제가 도래한 상황에서도 여전히 군사적 위협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은 소련에 대한 봉쇄정책을 넘어 ‘박멸(destruction of the Soviet Union)’해야 한다고 공공연하게 발언을 했으며, 이를 실천으로 옮기는 다양한 정책을 수행했다.[각주:16] 이후 신보수주의의 전통은 레이건 2기 행정부, 조지 부시(George Herbert Walker Bush) 행정부로 이어진다. 이런 와중에 소련을 위시한 동구권 국가들이 몰락하면서 북한은 동맹국들의 변화로 인한 고립의 위기 상황으로 접어든다. 미국과 세력균형을 이루던 소련이 무너지자 미국이라는 하나의 패권국만이 존재하는 일극 상황이 형성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이른바 ‘불량국가’로 낙인찍은 국가들인 쿠바, 리비아, 이라크 그리고 북한에 집중하게 된다. 이는 북한으로 하여금 경제 분야에 대한 투자를 자유롭게 하지 못하고, 여전히 군비에 집중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한다.[각주:17]

 

여기에 남한의 올림픽 개최와 경쟁하기 위해 준비되는 세계청년학생축전과, 사회주의권 몰락에 따른 동유럽과의 무역 축소, 사회주의권의 변화에 따른 중국과 소련으로부터 지원 축소 등은 기본적인 경제 역량을 훼손시켰다. 결국 북한은 80년대 중반부터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아서며, 후반에 이르러서는 위기의식을 표면적으로 드러낸다.[각주:18]

 

북한 정권의 입장에서는 당면한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해결책으로 지나치게 들어가는 군비를 줄이는 것이었다. 이는 평화체제의 구축을 의미했고, 본질적으로는 북미 간 수교를 통한 정상국가 인정과 불가침 조약의 체결을 해야 하는 문제였다. 그리고 미국과의 직접 교섭 전, 남한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분위기를 조성할 필요가 있었다.

 

남한과 북한 정권은 각각 모두 자신에게 닥친 위기를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측면 돌파의 한 방법으로 남북 대화라는 카드를 꺼내든다. 남북한 정권에게 남북 간의 관계개선은 중요한 정치적 카드이기 때문이다.

 

 

 


  1. 1) 이장희․유하영․문규석, 「남북 합의 문서의 법적 쟁점과 정책과제」(서울: 아시아사회과학연구원, 2007), 97쪽. [본문으로]
  2. 2) <남북기본합의서>를 구성하고 있는 남북화해(1장)와 불가침(2장), 교류협력(3장)의 내용은 7․4공동성명 이후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이전까지, 남과 북의 다양한 공식․비공식 회담에서 제기되었던 문제들을 전체적으로 정리했다고 볼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배광복, 「남북관계의 경로의존과 구성-7․4 남북공동성명에서 남북기본합의서 채택까지 남북회담 분석」(고려대학교대학원 정치외교학과 박사학위논문, 2008), 313~321쪽 참조. [본문으로]
  3. 3) 도회근은 <남북기본합의서>가 북한에서 최고인민회의가 아닌 상설회의와 중앙인민위원회와의 연합회의에서 승인을 받았기 때문에 이를 변칙적이라고 보며, 이 행위를 법적인 효력을 인정하는 행위로 볼 수 있을 것인지 여부에 대해서는 유보적 입장을 가진다. 하지만 이장희․유하영․문규석은 최고인민회의가 휴회일 때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가 법안 심의결정권을 가지며, 다음 차수 최고인민회의에서 승인을 받으면 된다는 당시 북한헌법에 비추어 북한이 조약으로서의 비준 절차를 충분히 밟았다고 보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도회근, 「남북한관계와 헌법」(울산: 울산대학교출판부, 2009), 116쪽; 이장희․유하영․문규석, 앞의 책, 116쪽 참조. [본문으로]
  4. 4) 도회근, 위의 책, 117쪽; 제성호는 <남북기본합의서>의 경우 남한 정부가 이를 공식화시키는 법적 절차를 거치지는 않았지만, 북한과의 협상이나 기타 남북 관계와 관련된 행위에서 <남북기본합의서>를 존중하는 등의 모순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법적 구속력을 부여하는 승인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제성호, 「남북한 관계론」(파주: 집문당, 2010), 49쪽. [본문으로]
  5. 5) 정규섭, 「남북기본합의서: 의의와 평가」, 「통일정책연구」제20권 1호, 2011, 20쪽. [본문으로]
  6. 6) 양무진, 「북한의 대남협상전략 유형」, (경남대학교대학원 정치외교학과 박사학위논문, 2001), 154-159쪽; 정문헌, 앞의 논문, 19-32쪽; 배광복, 앞의 논문, 224-232쪽; 김은주, 「‘7․4남북공동성명’과 ‘남북기본합의서’ 비교연구」, (서울대학교대학원 국민윤리교육과 석사학위논문, 2001), 50-63쪽; 임종헌,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이전까지의 남북한 관계 변화 연구: 통일방안을 중심으로」, 김세균 외, 「북한체제의 형성과 한반도 국제정치」,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6), 131-139쪽 등의 내용을 요약 정리. [본문으로]
  7. 7) 1987년 실시된 13대 대통령 선거는 투표율이 89.2%에 달했다. 이 선거에서 여당인 민정당 후보로 출마한 노태우는 36.6%를 득표해 대통령에 당선된다. 하지만 야당인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가 28%, 평화민주당 김대중 후보가 27%, 신민주공화당 김종필 후보가 8%를 득표해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동지적 관계였다고 볼 수 있는 김영삼과 김대중이 후보 단일화에 성공했다면 야당으로 정권이 교체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상황이었다. 「동아일보」, 1987년 12월 17일 1면; 「경향신문」, 1987년 12월 18일 4면. [본문으로]
  8. 8) 1988년 실시된 13대 국회의원총선거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집권 여당 민정당은 전체 의석 가운데 과반에 미치지 못하는 125석(42%)을 얻었다. 반면 야당인 평화민주당 70석, 통일민주당 59석, 신민주공화당 35석, 무소속 9석, 한겨레민주당 1석을 얻어 여소야대 정국을 형성한다. 「동아일보」, 1988년 4월 27일, 2-3면. [본문으로]
  9. 9) 전대협은 1989년에 임수경을 평양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에 파견하는 등 활발한 통일운동을 벌인다. 이는 통일논의에 있어 남한 정부의 권위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으로 볼 수 있으며, 북한의 대남 통일전선전술과도 연계되는 것이다. 1990년 김일성 신년사에서는 임수경의 방북을 직접 언급한다. “남조선인민들의 한결같은 통일념원을 안고 <<전민련>>고문인 문익환목사와 <<전대협>>대표인 나어린 림수경녀대학생이 사선을 헤치고 평양에 와서 북의 동포들과 감격적으로 상봉함으로써 온 겨레의 통일열망을 더욱 북돋아주었으며 조국통일의 절박성과 우리 민족의 확고한 통일의지를 내외에 시위하였습니다.” 김일성, “신년사(발취) 1990년 1월 1일”, 「련방제조국통일방안에 대하여」(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96), 369쪽. [본문으로]
  10. 10) 시국사범에 대한 구속자 수를 보면 1989년 1515명, 1990년 1812명, 1991년 1356명이다. 이는 전두환 정권 시절 시국사범으로 일 평균 1.6명이 구속되었던 것에 비해 노태우 정권에서는 일 평균 3.9명이 구속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박원순, 「야만시대의 기록 3」(서울: 역사비평사, 2006), 270~271쪽. [본문으로]
  11. 11) 1988년 서울올림픽은 소련과 동구 공산권 국가들의 참가 유치에 성공하였다. 노태우 정권은 1989년 헝가리와 수교를 시작으로 소련과 동구권 국가 및 몽골과 대사급 외교관계 수립, 1991년 중국과 무역대표부 교환 설치, 1992년 베트남과 외교기능을 갖는 연락대표부 설치를 진행한다. 정문헌, 앞의 논문, 23쪽. [본문으로]
  12. 12) 김연철,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과 남북기본합의서」, 「역사비평」 97호(서울: 역사비평사, 2011). 83~87쪽. [본문으로]
  13. 13) 김정일은 1980년 조선로동당 제6차대회에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 당 중앙위원회 비서,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1990년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1991년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1992년 조선인민군 원수의 자리에 오르고, 1993년 국방위원장이 된다. 시간 순으로 보면 1970년대 후계 구도에서 경쟁자였던 김영주의 실각으로 인해 경쟁력 확보, 1980년대 공식적인 등장, 1994년 김일성 사망 이전에 이미 북한의 실권을 장악, 이라는 순차적인 과정을 거쳤다고 볼 수 있다. http://ko.wikipedia.org/wiki/%EA%B9%80%EC%A0%95%EC%9D%BC (2011년 10월 15일 검색 내용) [본문으로]
  14. 14) 북한 경제 침체를 놓고 김연철은 지나치게 중앙집권화된 계획경제의 문제점을, 양문수는 외연적인 성장을 달성했으나 생산성의 향상과 같은 내연적인 성장이 함께 진행되지 못했던 것을 지적한다. 김연철, 「북한의 산업화와 경제정책」(서울: 역사비평사, 2001); 양문수, 「북한경제의 구조」(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초판 3쇄). 다만 여기에서 북한 경제 침체의 원인으로 군사비 지출을 고려하는 것은 북한 경제 제도 자체보다는 남북 관계, 북미 관계 등 국제적인 관계 속에서 1980년대 북한 경제가 침체된 이유를 찾기 위함이다. [본문으로]
  15. 15) 1954년 북한 예산에서 국방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8%였으나 계속 하강해 1963년에는 1.9%까지 떨어진다. 하지만 1969년 이후부터는 군사비의 비중이 30%로 급격하게 증가해 그 상태를 유지한다. 배광복, 앞의 논문, 80쪽. 북한이 공식적인 경제 통계를 내놓지 않기 때문에 국방비의 비중이 얼마나 되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며, 한국전쟁이 끝나 직후 국방비 비중이 8%, 1963년 1.9%였다는 점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다만 1960년대 들어오면서 국방비의 비중이 급격하게 증가해 북한 국가경제에 타격을 주었다는 것만은 사실로 보인다. [본문으로]
  16. 16) 레이건 행정부의 사회주의권에 대한 강압외교정책에 대해 실질적인 압력이 있었다기보다는 ‘말과 제스처’로만 일관했다는 견해가 있다. 실제로 소련에 대한 곡물금수를 해제하고 폴란드 자유노조운동에 적극적으로 지원을 펼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런 견해가 등장한다. 하지만 개도국과 동유럽의 민주화를 추진하는 ‘프로젝트 데모크라시(Project Democracy)’를 개념화하고 이를 구현할 ‘국립 민주주의 재단(NED, National Endowent for Democracy)’를 설립해 다양한 사업을 펼친 점도 사실이다. 손병권, “미국 신보수주의의 역사적 배경-1930년대에서 레이건 행정부 시기까지”, 남궁곤 편, 「네오콘 프로젝트: 미국 신보수주의의 이념과 실천」(서울: 사회평론, 2005), 75~76쪽. [본문으로]
  17. 17) 많은 경우 북한의 지도부가 개혁개방에 소극적이라는 생각을 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북한 지도부는 북한 경제가 자립적으로 설 수 없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으며 외부 세계와의 경제적 교류에 관심을 기울였다. 1970년대 서방 세계로부터 대규모 플랜트 시설을 수입했던 것, 1980년대 초 합영법은 물론이고 1980년대 후반 경제특구 지정 등은 모두 이런 관점으로 풀이해볼 수 있다. [본문으로]
  18. 18) 김일성, “에꽈도르좌익민주당대표단과 한 담화 - 1991년 5월 3일”, 「김일성 저작집 43」(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96), 62쪽; 김일성, “변화된 환경에 맞게 대외무역을 발전시킬데 대하여 - 당, 국가, 경제 지도일군협의회에서 한 연설 1991년 11월 23일, 26일”, 위의 책, 230쪽; 김일성, “현시기 정무원앞에 나서는 중심과업에 대하여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정무원 련합회의에서 한 연설 1992년 12월 14일”, 「김일성 저작집 44」(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96), 1쪽. 이 글은 「김일성 저작집 43」에 실린 첫 문건으로 전체 텍스트에서 ‘정상화’라는 단어가 15번이나 등장한다. 특히 공업 분야에 대한 언급을 할 때 ‘정상화’라는 단어가 주로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공업 분야에서 정상적인 생산체계가 상당히 무너졌음을 추측해볼 수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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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