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민족화해협의회(민화협) 안내원들은 남북민간교류를 위해 늘 수고를 아끼지 않는 분들이다.

오늘은 그 분들 중 몇 분의 이야기를 통해, 북한 사람들의 삶의 일면을 소개하고 싶다.

 

 

싱글벙글 웃으며 까칠 단장을 성실히 수행한 박선생

 

그림. 서영준 화백

 

안내원 박선생을 처음 본 것은 대기업의 대규모 평양 방북 때였다.

북 민화협 부회장이 방북 대표단 단장의 평양 관광 수행으로 연결하라며 내게 박선생을 소개해주었다.

북 민화협에서 많은 기대를 받고 있는 훌륭한 일꾼이니

남측 대표단 단장이 불편하시지 않도록 잘 보살펴 드릴 것이라는 소개말과 함께였다.

 

민화협 부회장이 대표단의 단장 안내를 직접 부탁한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두가지 면에서 의아스러웠다.

한가지는 왜 갑자기 수행을 따로 챙기는지에 대한 의구심이었고,

다른 하나는 처음 보는 신입사원인 것 같은데 까다로운 단장의 안내를 잘 할지에 대한 걱정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대기업 사장이었던 단장은 달갑지 않아 했다.

북에서 좀 더 비중있는 인물을 만나기를 기대 했던 것 같은데

첫눈에 신출내기 티가 나는 사람이 수행으로 붙으니, 신통할 리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사실 북 민화협에서 전문 수행을 붙여준 것만도 이례적인 특혜였는데 보기가 안쓰러웠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다가 박선생에게 살짝 다가가서

남쪽 분이라 북을 잘 모르니 좀 까실까실하더라도 개의치 말라고 귀뜸 해주었다.

 

그런데 그 박선생의 반응이 좀 뜻밖이었다.

 

“남쪽의 이렇게 높은 분을 만나 뵙고 안내를 해드릴 수 있게 된 것을 저로서는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앞으로 언제 이렇게 높은 분을 또 만나뵐 수 있을 런지요.

그러니 저는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지금이 너무 좋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발언이었다.

북한은 자본주의 기업인들에 대해 그다지 호감을 갖고 있지 않을 텐데

박선생이 정말로 영광스러워하는 걸까?

저렇게 까칠한데도 좋다고?

혹시 그저 임무니까 성실히 해야 한다는 뜻일까?

 

우리는 흔히 북쪽의 높은 분이 대단히 친절하게 남쪽 분들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거나,

‘통일전선사업’에 대해서 들을 때면 속셈은 따로 있고, 그 목적을 위한 위장전술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남한 보통사람들의 생각이 옳은지 그른지 잘 모르지만,

박선생의 모습은 정말 진실해보였고, 정치적인 제스츄어는 전혀 모르는 순박한 사람이라

처음 우리 단장을 ‘왜’ 수행하려고 하는지 얼핏 들었던 의구심을 오히려 무안하게 만들었다.

 

싱글벙글 웃으며 까칠 단장을 성실히 수행하던 박선생!

 

임무에 온갖 정성을 다하는 박선생의 성품이 높게 평가 받는 탓인지,

그 뒤로 박선생의 임무는 날이 갈수록 막중해지는 듯 보였다.

남쪽 표현대로 하자면 출세가도를 달린다고나 할까?

 

그 뒤 박선생과 사업을 할 때 왕왕

그의 원칙에 충실하려는 우직한 성품 때문에 임기응변에 강한 나와 충돌을 빚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북쪽 분들의 목적의식성에 대한 내 마음속 깊이 남아있던 편견때문인지 스스로 더 짜증이 나곤 했다.

 

 

캠퍼스 커플로 연애결혼한 자유분방 김선생

 

그림. 서영준 화백

 

이와는 대조적인 사람으로 김선생이 생각난다.

김선생의 부인은 중국계 은행에 근무한다고 했다.

자신들은 캠퍼스 커플이었는데, 대학 다닐 때 주로 도서관에서 데이트를 했단다.

남들 보기에는 공부하는 것 같이 해놓고, 사실은 연애를 했다고 한다.

항상 우리에게 자기 부인을 이야기할 때 ‘우리 놀새’라고 호칭한다.

 

김선생은 내가 보기에 민화협 안내들 중 사고가 자유분방한 편이다.

그러다보니 남쪽 사람들의 이 무궁무진하고 굉장한 다양성에 관한 이야기도 잘 이해하는 편이고,

나에게 어떻게 제기해야 북 민화협과 소통이 잘 되는지에 관해 조언도 많이 해주는 편이다.

또 남이나 북이나 행간을 잘 읽도록 도와주는 눈썰미가 있는 분이다.

 

내가 이 복잡한 남쪽 사람들과 남쪽 단체들 상대하기가 만만치 않느냐는 질문에 대해

김선생이 들려준 얘기는 좀 뜻밖이었다.

 

“우리 놀새가 나를 참 부러워합니다.

은행에서 일하다 보면 중국놈들에게 스트레스가 엄청난가 봐요.

횡포가 만만치 않은 것 같던데...

그러다가 남쪽에서 온 분들 이야기를 해주면 무지무지 놀라워하지요.

역시 같은 동포라 중국 사람들처럼 갈등관계가 아니라 혈육의 정이 넘치는 관계인 것 같다고,

그런 분들을 만나는 나를 부러워하지요”

 

우리는 조중혈맹에 대해 ‘북이 남쪽보다 중국에 너무 치우친 것 아니냐’는 우려를 많이 하는데,

실제 북한 주민들 사이에서의 중국에 대한 분위기의 단면을 본 것 같고,

그 분위기가 남측인 우리로서는 썩 나쁜 내용이 아니어서 기분이 좀 묘했다.

 

그런데 더 흥미로웠던 점은

나는 우리가 북에 갈 때 마다 민화협 분들을 너무 힘들게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는데

‘우리 놀새’의 말을 전해 들으니

민화협 안내분들도 우리 남쪽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고 감동도 느낀다는 점이었다.

어떤 때 감동을 느끼는지 묻고 싶었지만,

김선생은 호락호락 이야기해줄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밑천도 못 건지는 질문은 당연히 참았다.

 

나는 남쪽의 대학생들로부터 북한 대학생들도 연애를 하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놀새 부부의 이야기를 들려주곤 한다.

한번은 평양에 눈이 많이 내려 놀새를 위해 집 주변에 쌓인 눈을 쓸고 오느라고

허리가 아파 죽겠다고 엄살 부리던 김선생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말주변은 없지만 표정에 진심이 곧장 드러나는 신선생 

 

그림. 서영준 화백

 

또 한명의 안내원, 신선생! 진짜 정이 많이 든 분이다.

민화협의 많은 분들이 김일성 종합대학을 나온데 반해 신선생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말주변은 별로 없지만, 만날 때마다 반가운 표정을 감추지 못해 환하게 얼굴이 빛나던 분이다.

 

이분은 나와 큰소리로 싸운 적도 몇 번 있는데,

말주변이 별로 없다보니 나에게 “자신들의 심정을 잘 몰라주고, 이래저래 예단을 하는 것 같다”며

울고 싶은 심정으로 버럭 소리를 지르곤했다.

 

이분과 더 친해지고 싶지만,

늘 내가 제시한 무수한 요청사항과 참관 및 면담 일정 등을 차질 없도록 준비해주느라

공항에서 만나 잠시 일정을 협의한 후에 어디론가 땀을 뻘뻘 흘리며 돌아다니느라고 친해질 여유조차 없을 때가 많다.

 

이분이 내게 아주 은밀히 들려준 이야기가 있다.

 

“우리 장군님이 어떤 음식을 좋아하시는지 총장 선생은 압니까?”

“알턱이 있나요?”

“아마 알게 되면 이경선생은 우리 장군님이 정말 소박한 분이라며 깜짝 놀랄겝니다”

“그래요? 그 음식이 무엇인데요?”

“절대 비밀인데 말입니다. 우리 장군님은 무오가리를 제일 잘 드십니다”

“무오가리? 아! 무말랭이? 남쪽에서는 무말랭이라고 해요. 근데 그걸 제일 좋아 한다구요?”

“우리 장군님은 언제나 험한데만 찾아다니며 현지지도 하시느라, 밥 한술 제대로 드실 여유가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늘 무오가리를 가지고 다니며, 찬물에 밥 말아 무오가리 무침이랑 한술 뜨시지요.

무오가리 한종지만 있으면 밥을 정말 잘 드신답니다.

야! 우리 장군님 정말 소박한 분 아닙니까?”

 

그 말을 할 때의 신선생의 그 자랑찬 표정이야 말로 너무 순박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언젠가 일본 대하소설 ‘대망’에서 본 장면이 떠올랐다.

일본의 무사들이 말에서 내릴 틈도 없어 말위에서 오메보시 한쪽으로 물 말은 밥을 후루룩 마시고 또 달린다고 했던가?

신선생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이야기를 그렇게 하는 것 같다.

조선중앙방송에서 보던 것 보다 훨씬 더 생생하고 재미있는 이야기였는데

그건 아마 신선생의 표정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림. 서영준 화백

 

민화협 안내원들 한분한분 얼마나 개성있고 나름대로의 멋이 있는지...

 

뒷주머니에 빗을 꼽고 다니며, 머리를 쓱 한번 빗어 넘기고서는 ‘꽃사시오’ 노래를 잘 부르던 서선생.

 

우리가 늘 ‘00 각하’라고 부르면 배시시 웃던 대규모 행사진행 책임자 김선생.

(각하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는 이분이 야외 행사를 책임진 날은 절대 비가 오지 않는다고 자랑을 너무 해서

우리가 ‘천기를 움직이는 각하’라는 뜻으로 지어준 별명이다).

 

이빨을 제때에 치료하지 않아 세개나 빠진 자리가 허전한데 치아 치료라도 하기위해 같이 중국에 가자고 하면

‘일없다’며, 그럴 시간 있으면 유채꽃에서 기름을 짜는 연구나 더 해보고 싶다는 심선생.

 

이런 사람들이 남쪽 통일운동 단체들을 일선에서 마주하는 북한 민족화해협의회의 중요한 안내원들이다.

아마 지금은 많이 바뀌었는지도 모르겠다. 조만간 남북관계가 재개되면

다시 그분들과 장난치고 으르렁거리며 싸우기도 하며 함께 통일의 길을 갈수 있는 그 날을 고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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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환모임 행사장 앞에서 청년학생협력단이 춤을 추는 모습

 

최근 북한의 퍼스트레이디 리설주에 대한 관심이 뜨겁습니다.

 

2005년 인천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에 응원단으로 남쪽을 방문했을 때 찍힌 사진들이 공개되고 있는데요.

그 행사에 청년학생협력단이 응원단으로 초청한 단체가 겨레하나인 걸 아시나요?

 

청년학생협력단은 2005년 8월 28일 입국하여 8일동안의 일정을 마치고 겨레하나와 2차례의 행사를 가졌습니다.

9월 4일 오전 10시 인천전문대 체육관에서 열린 연환모임과,

같은날 저녁 8시 인천 파라다이스호텔에서의 만찬이 바로 그것입니다.

 

겨레하나의 2005년 사진첩을 뒤적이다 발견한 당시의 리설주 사진 2장을 공개합니다~^^

 

연환모임 행사장 안에서.

 

 

만찬장에서.

 

함께 만나서 손잡고 이야기하며, 웃으며 함께 춤추었던 그때 그시절이 무척 그립습니다.

하루 속히 남과 북이 다시 만나게 될 그날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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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21》기자로서 별로 자랑스러운 말은 아니지만, 지난달까지만 해도 나는 북쪽 사람과 직접적으로 대면해본 적이 없었다. 왠지 자주 만나고 어울려 지낸 듯한 느낌이 없지는 않은데, 이상하리만치 그런 느낌이 강한데, 실은 착각이다. TV 방송을 통해, 혹은 야외 행사장의 먼발치에서 지켜봤을 뿐이다.

 

일대일로 북쪽 사람과 만나 대화를 하면 어떤 기분이 들까. 가끔 그런 생각을 해봤다. 북쪽 사회에 대해 나름 아는 바가 있으니 어느 정도는 대화가 되겠지, 하는 자신감은 있었다. 북쪽 사람들과 대립하지 않고 무난하게 주고받을 수 있는 말들이 무엇인지 대충은 아니까.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의 소통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술잔 기울이며 ‘민족’을 주제로 웃고 떠들다 보면 하룻밤도 모자라 이틀, 사흘이 훌쩍 지나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지난달 북쪽 사람들과 처음 대면한 자리에서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쉽게 말을 걸고 하는데 나는 두리번거리기만 했다. 솔직히 어색했다. 나는 그냥 조용히 북쪽 사람들의 표정과 행동만을 지켜봤다. 우리가 만난 곳은 중국 단둥이었다.

 

***

 

단둥의 ‘아리스포츠’는 인천시가 투자해 지은 수제 축구화 공장이다. 지난 6월에는 송영길 인천시장이 방문해 북 노동자들을 격려하기도 했다. 아리스포츠 공장은 원래 평양에 설립될 계획이었으나, 5.24조치로 불가피하게 중국으로 나왔다. 현재 25명의 북 노동자들이 합숙 생활을 하며 축구화를 생산하고 있다.

 

송영길 인천시장(왼쪽 둘째)과 임동원 한겨레통일문화재단 이사장(오른쪽 둘째)이 지난 6월 9일 오전 단둥의 수제 축구화 공장인 ‘아리스포츠’ 공장을 찾아 북한 노동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 회사는 인천시가 자본을, 북한이 노동자를 제공하고, 중국이 경영을 맡은 남-북-중 합작 기업이다. (사진출처. 한겨레)

 

아리스포츠 방문은 일정에 없던 것이었다. 남북물류포럼이 주최한 ‘북중 접경지역 탐방’ 행사에 실무자로 따라갔는데 포럼의 김영윤 회장님이 아리스포츠 공장에 들렸다가 가자는 제안을 꺼내셨다. 북 노동자들이 일하는 공장이라는 이야기에 다들 관심을 보였다. 단교(斷橋)에서 아리스포츠 남측 직원을 만나 관광버스에 태웠다. 그의 손에는 세넷 켤레의 축구화가 들려 있었다.

 

“원래는 일반인들의 방문은 받지 않는데 축구화를 구입하러 오시는 분들이라고 북측 사람들을 설득했습니다. 게다가 오늘은 토요일이라 휴일이거든요.”

 

이런, 우리 때문에 토요일에 일하게 된 건가. 북쪽 사람들을 만난다는 기대감보다도 걱정이 더 컸다. 아무도 축구화를 사지 않으면 어떡하지? 다행히 몇 분이 바로 축구화 구입 의사를 밝혔다. 단둥 중심지에서 한 시간 정도 달려 변두리 지역에 있는 아리스포츠 공장에 당도했다.

 

***

 

글쎄, 그날 북쪽 사람들에게 말을 걸기 어려웠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우리가 ‘축구화를 구입하러 온’ 방문객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북쪽 노동자들의 눈빛에서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지?’ 하며 궁금해 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남북 간의 물류교역에 관심이 있는 기업인과 연구자도 있지만 관광 목적으로 온 이들이 태반이었다. 나는 물건을 살 생각도 없으면서 상점에, 그것도 외부인 출입금지 구역에 들어온 사람처럼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어슬렁거렸다.

 

그래서 나는 어색하게 말을 걸기보다는 그들의 사는 모습을 두루 살피기로 했다. 여자들은 재봉틀로 가죽을 재단하고 남자들은 축구화를 조립하고 있었다. 여자는 빨간색, 남자는 흰색 작업복을 입었는데 어떻게 빨았는지 남자들 옷이 눈부시게 희었다. 여자들은 비슷비슷하게 순박한 인상이었고 남자들은 투박한 인상이 반, 지적인 인상이 반이었다. (남자들 중 한둘은 정말로 인상이 반듯한, 공부밖에 모르는 학자 같았다.)

 

나는 작업장 옆으로 복도를 따라 늘어선 사무실 안도 몰래 살폈다. 사무실들이 대개 텅 비어 있었다. 이것저것 쓸모 있는 것들로 꽉 차 있었으면 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작업장과 맞닿은 사무실에는 덩그러니 책상 하나 놓여 있고 그 위에 노트북이 켜져 있었다. 북의 노래가 작게 흘러나왔다. 방문객들이 온다고 소리를 줄였나 보다.

 

결국 나는 북쪽 사람들과 한 마디도 제대로 나누지 못하고 공장을 나섰다. 기분이 별로였다. 대화를 나누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생활하는 환경이 너무 열약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단둥의 외진 농촌지역에서 그 정도면 잘 지낸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의 일상을 풍부하게 꾸며줄 만한 설비나 물품들이 너무도 보이지 않았다. 1층 숙소에서 생활하고 2층에서 일하며 공장을 떠날 일도 별로 없을 텐데, 쉬는 시간에는 뭘 하며 지내는 거지?

 

 

물론 TV가 있고 운동시설이 있다고 반드시 즐거운 것은 아니다. 집단생활에는 그 자체의 묘미가 있고,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가장 즐겁다는 것 또한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TV도 있고 운동시설도 있으면 좋잖아. 다음에 다른 상황에서 만나면 꼭 물어볼 생각이다. 심심할 때에는 무엇을 했는지. ‘TV랑 운동시설 없어도 우리는 재밌게 지내기만 했수다’라고 이야기한다면, 딱히 대꾸할 말은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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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이제까지 주로 북을 만났을 때 당황했던 일, 남북의 차이로 인한 에피소드 등을 소개했던 것 같다.

이번에는 자본주의 경쟁 사회인 남쪽 사회와는 체제가 전혀 다른 사회주의 사회에서

우리와 다른 방식의 삶의 가치와 꿈을 꾸며 살아가는 ‘북녘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편 소개하겠다.

 

남쪽에서 기획, 촬영, 편집한 북한 음식관련 문화와 풍습을 주 내용으로 한

‘조선요리 100선’이라는 영상을 만들 때의 일이다.

 

<조선요리 100선>은 각 지방의 마을마다의 지역 별미 요리 및 관련한 문화와 사람들의 이야기를

함께 다루는 <북한 전 지역 사람들의 삶과 문화 다큐멘터리>였다.

묘향산에 유명한 <돌버섯[각주:1] 요리 편>을 기획하면서, <돌버섯 캐는 사람의 이야기>를 같이 다루기로 했다.

돌버섯은 맛도 좋지만, 묘향산 깊숙한 곳의 큰 바위에서만 캘 수 있는 귀한 버섯이라

채취 스토리가 들어가야 돌버섯 요리의 진가를 잘 알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이 버섯 캐는 아저씨를 만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고 한다.

산삼 캐는 심마니들처럼 한번 버섯을 캐러 산속으로 들어가면 며칠이고 나오지 않기 때문이라는데...

남쪽 기자가 북한 산속을 헤집고 돌아다니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이 촬영은 우리의 다음 방북 때까지 북 ‘내나라 비디오’의 김 선생이 책임지고 진행하기로 했다.

 

그 다음번 촬영 방북 시, 내나라 비디오의 김 선생은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다며 미안해했다.

몇날 며칠을 고생하면서 묘향산을 돌아다닌 결과,

버섯 캐는 사람을 만나기는 했는데 그분은 인터뷰를 한사코 거절하셨다고 한다.

 

“왜요? 힘들게 버섯을 따는 과정을 자세하게 취재해야 생생한 다큐멘터리가 되는데....

그깟 것 하나 설득 못해요? 인터뷰가 있어야 묘향산 돌버섯이 유명해진다고 말하지 그랬나요!”

 

남쪽에서 함께 간 박PD와 내가 김선생에 면박을 주자, 그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인터뷰 거절의 사연을 이야기해주었다.

 

그 아저씨의 말은 대략 이런 것이었다.

 

"버섯은 워낙 캐기가 어렵습니다.

사람손이 닿기 어려운 큰 바위 틈새에만 피어있기 때문에 바위에 대롱대롱 매달려 따야하는 경우도 많지요.

어떤 때는 목숨을 내놓고 따기도 하거든요.

근데 제가 이렇게 힘들게 돌버섯을 캐는 것을 사람들이 본다면 어디 돌버섯을 먹으려고 하겠어요?

마음이 아파 먹지 못할 겁니다. 사람들이 돌버섯을 맛있게 먹는 것이 중요한데, 

저는 그분들이 이 요리를 먹지 못할까봐 텔레비전에 나갈 수 없습니다."

 

그림. 서영준 화백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 참 희한한 사람이다.

자기가 힘든 것을 보면 사람들이 마음 아파 돌버섯 요리를 먹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도 희한하고,

자기의 노고를 알아주는 것은 전혀 중요치 않고 사람들이 맛있게 먹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 두가지가 대립되었던가? 도무지 무슨 말인지.... 그런게 인터뷰를 거부하는 이유가 된다는 것인지....

 

이런 혼란을 느낀 이유는 남쪽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경우이기 때문인 듯 했다.

남쪽에서 식자재를 채취하는 분들의 경우 과정이 어려우면,

그를 적극적으로 홍보하여 더 비싼 값을 받으려 할텐데.... 희소가치가 높으니 당연한 것 아닌가?

또 남쪽 시청자들도 마음이 아파 그 요리를 못 먹는 것이 아니라

정 반대로 호기심이 발동하여 비싼 값을 주고라도 더 적극적으로 먹어보려 할텐데....

 

북쪽 사람들의 정서는 남쪽 하고는 다른가? 가슴 아파서 정말 먹지 못할까?

어느 편이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성인가 하는 문제와

혹시 이 차이가 양 체제의 차이로부터 기인하는 문제일까 하는 생각 등이

두서없이 떠올라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이 문제는 내가 몇 십 년을 통해 씨름해온 고민과도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학생운동을 거쳐 평생을 민중을 위해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운동가이다.

그런데 나는 그 아저씨처럼 실제 민중을 위해 순수하게 온전히 복무하는 그런 삶이 실현 가능하다고 얼마나 믿고 있는지...

 

인간이란 사회적 존재이기도 하지만 개별적인 삶을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개별인간으로서의 평가와 성공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이 두가지의 문제를 늘 적절히 절충해왔던 것 같다.

 

이 말은 민중을 위해 복무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개별인간으로서의 ‘나’에 대한 사회적 인정여부와 평가, ‘나’의 발전을

가슴 한 켠에 따로 챙겨두는 습성을 버리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런 나라면 돌버섯 따는 아저씨처럼, 인터뷰를 거절했을까?

나의 고생과 정성을 광고하며 더 맛있게 먹으라고 권하지는 않았을까?

그런데 그게 잘못된 걸까? 아닐까?

 

김 선생은 북에서는 그런 분들을 ‘숨은 영웅’이라고 한다고 했다.

어디에서건 어떤 일을 하건 묵묵히 인민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아

그 정신을 따라배우기 위해서 ‘숨은 영웅 찾기’ 운동을 전개하는 것이라며,

북에는 그런 사람이 무척 많다고 살짝 귀띔해 주었다.

 

북쪽 사람들이 남한 사람들보다 더 행복한 것은 아닐지 모른다.

행복의 기준은 사회마다, 사람마다 다르므로 그것을 한두 마디로 평가할 수 없다.

그러나 버섯 따는 아저씨와 같은 북녘 사람들의 순박한 삶을

‘아직 발전이 덜된 시골적 가치’라고 가볍게 보고 넘어간다면,

사회와 개별 인간의 관계를 해석하는 양쪽 사회의 가치의 차이를 심도있게 보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나는 묘향산을 갈 때마다

버섯 캐는 아저씨의 아름다운 모습이 그저 야생화처럼 숲속에 늘 그렇게 피어 있는 듯 느껴진다.

 

 

 

 


  1. 북을 몇 번 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돌버섯 요리를 안다. 묘향산 향산호텔에서는 곰취, 도라지 고사리 등 이름도 모를 갖가지 나물반찬과 산채국이 유명한데 그중 <돌버섯 요리>는 남쪽에서는 먹을 수 없는 향산 만의 별미 요리이다. 하도 특색이 있어 말린 돌버섯을 서울에 몇 번 가져오기는 했지만 돌버섯이라는 이름처럼 어찌나 돌이 많은지, 몇 번 요리에 실패한 경험도 있는 나로서는 돌버섯 요리의 채취와 요리법소개에 더 열을 올렸던 것 같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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