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양각도 호텔에서는 나를 아직도 <아리랑 대장>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2005년 9월말부터 11월 초까지 한달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양각도 호텔에 상주하면서

겨레하나 4000명 관광객을 비롯하여 만명이 넘는 남한 관광객을 지원하다 보니 붙여진 별명이다.

북한경험담의 앞부분에 그 당시의 각종 사건 사고 몇 가지를 소개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주로 <아리랑>공연을 소개하고 그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정리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아리랑’은 우리민족의 100년 역사를 형상화한 서사극이다.

민족의 정서와 넋이 담겨있는 민요 아리랑을 주제로 ‘민족의 운명사’와 세시풍속을 서사시로 표현한

 대집단체조이자 예술공연으로 100년간의 고난과 해방, 북한의 건국, 발전 과정을 보여준다.

각각의 내용은 10만 명이 참가하는 카드섹션 및 집단체조로 표현되는데,

여기에 화려한 빛의 레이저 영상이 어우러지면서 시각적으로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하얀 치마저고리를 받쳐 입은 여성들이 한반도와 제주도, 울릉도 모양에 이어 독도까지 만들어낼 때,

한쪽에서는 ‘우리는 하나’라는 웅장한 카드섹션이 펼쳐진다.

 

‘아리랑’을 보는 남한 사람들의 심정은 복잡하다.

그 스케일과 예술성, 집체성에 큰 충격과 감동을 받으면서도 형식과 내용면에서 고민이 생긴다.

 

우선 쉽게 제기하는 것은 인권 문제이다.

한창 뛰어 놀 고등중학교 학생들이 학업을 전폐하고 집단체조에 동원되어

배경대(카드섹션)나 체조대 연습에 매달리는 것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이런 집체의식은 과거 70∼80년대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시절의 전국체전 카드섹션이나

안보실기대회 제식훈련에 동원된 남한의 고교생들과 다를 바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림. 서영준 화백

 

 

공연의 규모나 짜임새만 보면

모든 것을 전폐하고 오랫동안 혹독한 연습에 올인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학교 수업을 받고 일상생활을 하면서 방과 후에 학교와 지역별로 나누어서 연습하는 것이지

10만 명이 한 장소에 갇혀서 수개월을 보내는 것이 아니다.

 

영국인 대니얼 고든이 만든 북한 다큐멘터리 ‘어떤 나라’를 보면

2003년 아리랑을 준비하는 2명의 여중생과 그 가족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열세 살 현선이와 열한 살 성연이는 김정일 장군님께 자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추운 겨울에도 강도높은 훈련을 하고, 때론 연습을 몰래 빼먹기도 하고, 늦잠 때문에 허둥대고 등교하기도 한다.

우리네 여느 10대 소녀들과 다를 바 없다.

 

물론 2시간 넘게 정신없이 카드섹션을 하면 정말 팔이 많이 아플 것 같다.

공연 도중 <울림폭포>라는 거대한 구조물이 무대배경으로 등장하는 시간이 있는데

그 뒤에 있게 되는 배경대 (카드섹션) 아이들이 팔을 좀 쉴 수 있겠다며 안심하시는 분들도 있었다.

아이들의 수고를 걱정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인지상정일 것이다.

북쪽 사람들 마음도 똑같다.

민화협 안내원들은 오전에 비가 와서 땅이라도 축축한 날이면

운동장에서 뒹굴며 마스게임을 해야 하는 꼬마 아이들 걱정에 숨이 깔딱깔딱 넘어가곤 했다.

 

그러나 고생이긴 해도 세계를 향해 그런 훌륭한 공연을 하고 있으며,

자기도 그 일원이라는 생각은 공연 참가자 누구에게나 긍지인 듯 했다.

내가 묵고 있던 양각도 호텔의 청소부 아주머니가

자기 딸도 아리랑 공연에 참가한다는 것을 어깨 으쓱해가며 자랑하신 적이 있다.

민화협 안내원들도 학생 때 카드섹션에 참여했단다.

그때 카드 뒤에서 살짝 고개를 삐죽 내밀고

다른 학교 아이들이 자신의 학교보다 더 잘하는지를 비교해 보다가 혼나기도 했다며,

힘들긴 했지만 즐거운 추억이라고들 이야기한다.

 

혹독한 연습과 훈련이 반인권적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누구도 올림픽 메달리스트들의 혹독한 훈련을 반인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단지 혹독한 훈련인가의 여부보다는

그 공연을 보고 곤혹스러워지는 본질적인 이유는 다른 데에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남과 북의 각기 다른 사회체제로 인한 사상 문화의 차이가 아닐까?

 

기꺼운 마음으로 이른바 ‘영예군인(상인군인)’들과 결혼하는 북한 여성들,

집단을 위해 개인을 희생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청소년들의 이야기는

개인 이기주의에 물들어있는 남한사회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따라서 개인은 전체를 위하고 전체는 개인을 위한다고 하는

집단주의 사회의 기본 특성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아리랑' 같은 대집단체조와 예술 공연을 이해할 수 없다.

 

내용면에서도 <아리랑>은 우리에게는 좀 낯설다.

우리 민족의 100년의 역사를 형상화하며 북한이 외세와 꿋꿋이 싸워 몰아내는 과정,

해방과 건국 그리고 분단, 이후 북한 사회의 과정을 민족적 정서와 한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미래를 개척해나가는 일심단결이 더해져 완성되는 줄거리는

우리가 학교 때부터 배웠던 역사하고는 완전히 다르다.

어느 쪽이 더 진실에 가까운지, 또 무엇에 공감하고 동의할 수 없는지, 혼란스러울 수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나는

장구한 세월 속에서 쌓여져있는 인식의 틀이 있는데

한 번의 공연을 보고 논쟁의 각을 세우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이야기한다.

중요한 것은 북한의 시각에 우리가 동의할 수 있는가 아닌가의 문제가 아니라

북한의 가치와 정서, 그리고 역사관이 어떤지를 살펴볼 절호의 기회로 생각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옳고 그름의 가파른 예각화를 떠나 다니엘 고든처럼 ‘어떤 나라’라는 시각으로

담담하게 <아리랑>을 볼 때, 얻을 수 있는 것이 훨씬 더 많지 않을까.

왜냐하면 북한이란 우리가 좋건 싫건 상관없이 화해협력하고, 통일해야할 상대방이니까!

 

화해하고 협력하려면 우선 상대를 알아야 한다.

상대를 알아야 어떻게 협상하고, 무엇을 조심해야

통일 과정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이 최대치가 되는지 기본 가닥을 잡을 수 있다.

북한에 대한 거부감과 북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서로 상충되지 않는다.

아직 이해되지는 않지만 그들의 생각을 존중하고 구동존이하려는 노력!

그것이야말로 통일의 긴 여정을 가야하는 우리 국민들의 몫이다.

 

혹자는 <아리랑>이 남한 사람들이 보기에 너무 부담스러운데

정치적으로 편안하게 다루어주면 안되냐는 문제제기를 하기도 한다.

그래야 보수든 진보든 많이 볼 수 있지 않느냐고 말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이해해야할 점은 애초에 <아리랑>은 남한을 의식해서 만든 것이 아니고

북한 자신을 위한 예술 공연이라는 사실이다.

북한은 자신들의 정신문화세계를 형상화하며,

그 과정을 통하여 어려운 상황을 헤쳐 갈 카타르시스와 위안을 얻는다.

서방세계와 남쪽 관광객들도 유치하려고 노력하지만

영리가 주목적이기보다는 북한만의 방식으로 ‘평화의 메시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 공연을 보고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관광객 각자의 몫이다.

 

<아리랑> 공연을 본 사람들의 반응은 정말 다양하다.

아이들의 인권 문제를 제기하며 한숨을 푹푹 쉬는 분들도 있고,

경제적으로 어렵다면서 저런데 돈을 쓰는 것이 옳으냐는 반론을 펴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한결같이 북한 주민들의 일심단결력, 그들의 사상, 그들의 문화에 대해

그전에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강한 충격을 느끼는 것도 일반적인 사실이다.

<아리랑>은 남한 사람들에게 ‘북한의 실체’를 알리는 커다란 영상으로 조용히 다가왔다.

 

다음번에는 아리랑 공연 관람과 평양 관광을 한 달 동안 지속하기위해 넘어야 했던 고비의 순간을 소개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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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이 협력사업을 하다보면, 예상치 못한 곳에서 양 체제의 차이가 갑자기 드러나는 돌발상황이 종종 있다.

어떤 때는 남쪽 후원자들 앞에서 남쪽이 전혀 이해하지 못할 발언을 하는 공장 지배인들도 있고,

역으로 남쪽 방문객들이 북측을 매우 민망하게 할 질문들을 쏟아내어 여러 사람을 당황하게 하기도 한다.

 

그럴 때는 북의 안내원이나 남쪽 대북협력사업자들이

슬기롭게 상황을 정리할 수 있는 임기응변과 기지로 넘어가기 마련이다.

그러나 때로 대북사업자들보다는 해당 사업을 하며 방북을 했을 때,

오히려 남쪽 전문가들이 훨씬 더 북의 고민을 빨리 이해하고 답을 주는 경우도 많다.

이번 글은 함께 방북했던 기계 제작 납품회사 사장님이 내게 새로운 각성의 계기를 마련해준 이야기이다.

 

평양 룡성구역에 장류공장 설비를 지원할 때였다.

장류공장이란 된장, 고추장, 간장을 만드는 공장을 말한다.

북이 장류공장을 짓고 싶은데 남측에서는 현대화된 기계와 전기 승압장치 등을 지원해주고[각주:1]

북에서는 공장건물과 노동력을 맡아서 공장건설이 차곡차곡 진행되었다.

 

그림. 서영준 화백

 

 

방북할 때마다 룡성 장류공장 책임자가 부탁하는 지원 요청 품목이 자꾸 추가되어,

우리는 사실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비용이 늘어나면 우리의 예산으로는 집행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남북 협력 사업을 할 때마다 발생하는 일이지만

공장에 페인트 칠을 새로 해야 한다던가, 공장을 운영하는 집기나 소모품 등을 추가로 요청하곤 한다.

북에서는 공장 건물과 노동력만 대고 나머지는 남쪽에서 협력하기로 정리된 사업장인지라,

북에서의 자체적인 예산은 받지 못하는 듯 했다.

우리는 기계 설비와 전기공사에 관한 것 빼고 웬만한 것은

다 거절할 수밖에 없으면서도 그런 과정 자체가 얼마나 힘들고 안타까운지...

북의 사정을 보면 해주고 싶은 마음 굴뚝같지만

우리도 처음 후원자를 확보할 때 세운 예산을 초과할 권한과 능력이 없어 어쩔 수 없었다.

 

설비 조립이 거의 완료되고 그 점검 차 방북했을 때였다.

당연히 남쪽에서 기계 설비 설치 전문가가 같이 동행하였는데,

그분은 남쪽에 웬만한 대규모 된장 고추장 회사들의 공장건설을 맡아했다는 <식품가공 기계제작 회사> 사장님이었다.

 

2007년 9월 평양 룡성구역의 장류공장에서 기계설비를 점검하던 모습

 

대략의 설치와 정상가동 상태를 점검하던 중

노동자가 삶은 콩 함지를 얹은 지게를 매고 철 구조물로 만든 계단 몇 개를 올라가

콩을 분쇄기에 쏟아 붓는 부분에서 북측 공장 지배인이 우리 사장님에게 질문을 하였다.

내용인즉 그곳에 에스컬레이터나 엘리베이터를 설치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무거운 콩 지게를 어깨에 매고 계단을 걸어 올라가면 노동자의 허리와 어깨가 무사하겠느냐는 것이었다.

 

우리 사장님은 갑자기 ‘헉...!’ 할 말을 잃은 듯 했다.

그러면서 남쪽에서 웬만한 고추장 된장 만드는 대기업의 기계 납품을 해보았는데,

어디에도 그런 설비를 갖춘 것은 없어서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남쪽에서는 그냥 노동자가 하는 일로 일상화 되어 있어서 그 누구도 그런 문제제기를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남쪽 사장님의 답변에 북 공장 지배인은 더욱 황당해 했다.

너무 당연한 설비 아니냐고!

남측에 그 크고 화려한 공장들에 그 정도의 자동화 시설이 없다는 게 이해가 안 된다고!

 

나는 실제 우리 식품회사 대기업에 그런 자동화 설비가 되어 있는지 아닌지 잘 모른다.

사장님 말이 그런 게 없다니 그런가보다 하지...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북측이 좀 심하다는 느낌이었다.

남쪽이 인도지원으로 어렵게 자금을 구해 가까스로 그 사업을 할 경비를 마련하는데

남쪽에도 없는 웬 자동화 설비? 그것까지 주문하는 거는 너무 심하지 않나?

 

그림. 서영준 화백

 

 

쉬는 시간이었다.

사장님이 자기 돈을 들여서라도 그 설비를 해주고 싶다는 제안을 하셨다.

그 사장님은 이 사업의 실제 후원자인 안성시로부터 돈을 받고 일을 해주는 고용인이었기 때문에,

자기 돈을 내서 지원을 해주어야할 그 어떤 의무도 없는데 그런 제안을 하시는게 잘 이해 되지 않았다.

 

“아니 왜요? 거절하면 되는데, 사장님이 비용을 내서 하신다고요?”

내가 물끄러미 사장님을 쳐다보자 사장님 말은 더 뜻밖이다.

사장님 본인이 감동을 받아서 그렇게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셨다는 답변이었다.

자기가 지금은 사장이지만 공장에서 잔뼈가 굵은 노동자 출신인데,

노동자의 어깨와 허리를 걱정해주는 경영인이나 관리인은 없었단다.

작은 문제이지만 남쪽에서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북이 사회주의라더니 그래서 그런지 남쪽과는 좀 다른 것 같다고 하였다.

 

그림. 서영준 화백

 

망연자실...

똑 같은 상황에서 똑 같은 말을 듣고 나는 그 사장님처럼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남쪽에도 없는 더 세련된 기계 설비를 요구 하는 것 같아

약간의 짜증까지 난 상태에서 어떻게 거절할지를 고민 중이었는데 사장님은 감동을 받았다니?

 

사장님과 나의 차이는 무엇일까?

나는 책을 통해 관념적으로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배웠는데, 노동자들은 힘든 노동을 통해 세상을 이해한 차이인가?

책상에서 배운 이론적 이해와 삶을 통해 얻은 실제적 감수성의 차이인가?

그러고 보니 나에게는 노동자 혹은 노동자 출신이 겪는 고통도, 분노도,

따라서 노동현장이 무엇을 중심으로 돌아가야 하는지에 주견도 없다...!!

 

갑자기 우리 사장님이 조금 전까지와는 다른 사람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냥 장사치인줄만 알았는데,

인정이 있고 사람의 삶을 여유있게 돌아볼 수 있는 철학을 가진 분이었구나!

나는 남북협력사업을 할 때마다 합의안을 이행하기에 급급하여

정작 중요한 자기 성찰의 좋은 계기를 스쳐 지나가버리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 일은 갑자기 내가 애초 남북민간교류를 통하여 추구하고자 했던 초심으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그것은 남쪽과는 전혀 다른 체제인 북녘에서 북쪽 분들의 삶의 방식을 보면서

우리와는 무엇이 다른지, 서로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민족의 동질성이 어떻게 확인되는지,

남북의 협력과정을 통하여 남북 모든 사람들의 분단이 어떻게 함께 치유되어야 하는지를 모색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선입견과 좁은 틀에 얽매여 있었던 나 스스로를 해방하는 길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장류공장을 건립하고 준공식 이후 몇 년 동안 그 공장을 가보지 못했다.

우리가 원료를 지속적으로 공급하기로 했으면 가 볼일이 있었으련만

공장 지어주는 것으로 완료된 사업이었기에 그 후 현장에 가볼 기회가 없었다.

글을 쓰다 보니 그때 사장님이 지어준 그 자동화 설비를 사진으로 찍어둘걸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

 

 

 

 


 

  1. 이 지원사업의 주체는 안성시였다. 안성시는 안성시 소속 바우덕이 풍물패의 평양 공연을 성사시킴으로서 바우덕이 풍물패의 우수성을 전국적으로 알리고 싶어 했고, 북은 장류공장을 지음으로써 그 공연의 성사를 위한 북 내부에서의 명분을 만들자고 했다. 안성시의 장류공장 지원기금은 안성에 있는 기업의 후원이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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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의 '고난의 행군' 과연 나에겐 어떤 의미였던가?

 

북의 ‘고난의 행군’[각주:1] 은 90년대 중반부터 불어닥친 북한의 위기상황을 극복한 방식에 대한 이야기이다.

 

3년간 연속된 대 홍수로 온 나라가 물에 잠기는 등 유래없는 재앙이 몰아닥쳤다.

또 갑작스런 동구 사회주의권의 몰락으로 구상무역[각주:2] 이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북한 경제는 근본적으로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국제무역 결제 방식이 바뀌어 석유와 식량을 수입할 달러를 구할 수 없어,

아사자가 속출하고, 기차와 자동차는 멈추었다.

물에 잠긴 광산에서는 더 이상 석탄을 캘 수 없었고,

기름과 원자재 없는 공장은 줄줄이 문들 닫을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북의 최고 지도자 김일성 주석의 사망까지 덮쳐,

북한은 아마도, 3일내, 혹은 3주일 내, 그것도 아니면 3개월 내 망할 것이라는 소문이

국제사회에 파다할 정도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자신들의 체제에 순응 편입하기를 거부하는 북한을

경제적으로 더욱 봉쇄하고, 압박하는 전술을 구사하였다.[각주:3]

당시 상황은 러시아도 중국도 미국에 맞서 북과 공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공장도 멎고, 전기도 끊어지고, 먹을 식량은 없는 나라!

그런 나라가 생존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90년대 중후반 그것이 북한의 실제 모습이었다.

 

조국의 절반이 이렇듯 처참한 지경임에도 불구하고,

남한에 사는 우리들에게 이 재앙은 함께 극복해야할 뼈아픈 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저 '동토의 땅, 북한! 2대째 내려오는 그 독재자의 나라에 가엾은 주민들만 굶어 죽네'라는 느낌이었다.

먼 아프리카 어느 오지의 가난을 바라보는 같은 것이 객관적인 평가였을까?

아니 그보다는 더 냉소적으로, ‘강 건너 불구경’하는 분위기였다는 것이 정직한 이야기이다.

백만 아사설이 심심치 않게 언론에 회자되면서

97년 나는 잠시 북한 동포돕기운동에 아들 아이의 돌반지를 팔아 성금을 낸 적이 있지만,

그때만 해도, 북의 가난의 실체에 대해서 구체적 표상으로 다가오지는 않았었다.

 

 

그림. 서영준 화백

 

아마도 반공반북 교육으로 머릿속에 철저히 무장된

분단의 다른 한쪽 대한민국의 국민들에게는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북한은 한 핏줄도 이웃도 아니며, 그저 관념 속에 존재하는 이상한 동네,

또 그런 이상한 동네가 과연 실제 하는지 실감조차 할 수 없는 거대한 감옥같은 이미지일 뿐이었다.

 

그러나 북한의 재앙에 대하여 아무런 표상을 갖지 못했던 진짜 이유는 분단으로 인한 이유만이 아니었다.

대한민국에서 살아온 나에게 수해나, 빈곤의 문제가 아무리 심각해도,

그것은 일부 지역, 일부 계층의 문제였지, 전 국가적 문제인 적은 한번도 없었고,

'나'와 '우리' 에게 당장 닥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다.

고도로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 대한민국에서 ‘빈곤의 문제란

국가적 문제가 아닌 일부 저소득층의 문제’일 수밖에 없었고,

자연재해란 일부 시골에만 해당되는 지극히 예외적인 우발사태에 불과한 문제라는 뜻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국가적 빈곤’이라는 말 대신에 ‘국가부도 사태’라는 말이 심심찮게 회자된다.

국가부도 사태를 예감하게 되면 온갖 것을 내주고라도 외자를 끌어들이고,

외자의 요구에 의해 국가적 구조조정에 들어가게 되면 계층 간의 갈등이 엄청나게 증폭되고,

마치 나라 전체가 외국자본이라는 전당포에 명줄을 저당 잡힌 꼴이 되어도 별수 없이 항복 선언을 한다.

 

또 항복 선언을 할지언정, 그 나라의 브랜드 가치, 외양적 화려함을 포기해서도 안된다.

그 모든 것이 ‘자본을 끌어올 수 있는 중요한 담보’이므로 그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속이 곪아도 겉은 화려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악순환?

국가적 경제위기인 국가부도, 그에 대한 자본주의 국제사회가 대처하는 모습의 정석이다.

 

그런데 2001년 내가 본 평양의 남루한 모습, 숨기지 않은 국가적 빈곤!

그것은 그전에 내가 한번도 상상해보지 않은 희한한 풍경이었고 설명하기 힘든 충격이었다.

 

북한은 정말 자본주의식의 선택을 하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하지 않은 것일까?

또 북한은 자본주의식의 선택 대신 과연 무엇을 선택했나?

정권 유지인가? 아니면 북한의 말대로 국가적 자주권인가?

 

이후 북한을 드나든 10년간 늘 느껴야 하는 원초적인 질문이다.

평양은 나에게 그렇게 조용한 충격으로 ‘사회주의 자주국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위용을 드러냈다.

 

 

 


  1. 1990년대 중ㆍ후반 국제적 고립과 자연재해로 수백만 명의 아사자가 발생하는 등 북한이 경제적으로 극도의 어려움을 겪은 시기에 제시된 구호를 말한다. 원래 고난의 행군이란 말은 1938년 말∼1939년 김일성 주석이 이끄는 항일빨치산이 만주에서 혹한과 굶주림을 겪으며 일본군의 토벌작전을 피해 100여 일간 행군한 데서 유래했다 [본문으로]
  2. 일정 기간 동안의 수출과 수입이 균형을 이루도록 두 나라가 협정하여 차액 결제를 위한 별도의 자금 지불을 필요로 하지 않는 무역 제도 [본문으로]
  3. 베트남 전쟁 당시 북한은 베트남에 전투비행사를 보내 미군 전투기를 수없이 떨구어주었으며 부상당한 많은 베트남 병사들을 평양 병원에 옮겨 극진히 치료해주었다. 고난의 행군 시절 북한은 그 베트남에게 쌀 지원을 요청했지만 베트남 당국자들에게 외면 당했다. 베트남 정부는 몇 줌 안 되는 쌀을 주면서 ‘미국이 북한에 식량지원하는 것을 반대하기 때문에 지원할 수 없다며 이해해달라’고 애청하였다고 한다. 이북의 외교관은 분노의 음성으로 그 쌀을 하노이에 있는 거지들에게나 주라고 하면서 그냥 돌아갔다고 한다. 이것만 보더라도 러시아 패망이후 미국이 철저히 북한을 봉쇄한 것이 얼마나 잔인했는지 잘 알 수 있다. 북은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출처] 브루스 커밍스가 바라본 북한(1)-70년대에는 북한이 더 잘 살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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