훗날 나와 친해진 민화협 김선생이 들려준 이야기가 있다.

 

아리랑 공연 시절에 자기는 일반 관광객들과 버스를 타고 다니며 안내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그때는 내가 좀 얄미워 보였단다.

자기들은 연일 1000명 남짓 쏟아져 들어오는 남측 관광객들을 안내하느라

밥먹을 틈도 없이 정신이 없고 몸살이 날 정도인데,

상황실장이라는 웬 아줌마가 비행기가 도착할 시간이면 순안 공항에 들려 사람들을 쓱 한번 둘러보고

호텔로 들어가는데, 하는 일도 무엇인지 잘 모르겠고 폼이나 잡는 것처럼 보였다고 했다.

그때 나의 속사정을 일일이 설명할 수도 없고,

이 지면을 빌어 하루하루 전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그때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려한다.

나중에 남북교류가 전면화 될 상황에 참고할 수 있는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2005년 가을이라는 시기, 하루 300명이상의 관광객을 평양으로 보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얼핏 생각하면 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줄을 설텐데,

선착순으로 쭉 비행기를 태워 보내면 되지 않느냐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왕복 비행기 값, 호텔 숙박비, 차랑 비용, 아리랑 공연 입장료 등 적지 않은 비용을 내고,

주중에 1박2일의 일정을 비우는 결정을 신속하게 내리는 것은 쉽지 않다.

평양 관광의 초반부에는 겨레하나의 지역본부가 잘 구성되어 있는 인천이나 울산 등이

신속하게 움직여 대형 비행기를 채우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갈수록 상황은 쉽지 않았다.

 

겨레하나 총 17차의 평양 관광단을 태울 전세 비행기는 이미 예약이 완료였고,

탑승객이 한명이든 100명이든 출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루하루 숨이 가빴다.

북한은 대략 12시까지는 이틀 후의 명단이 들어와야 신원 조회 후 초청장 발송이 가능하다고 했으나,

서울에 있는 겨레하나 사무실로 명단과 함께 인적상황 서류접수가 완료되는 시간 자체가 늘 12시를 넘기 마련이었다.

 

지역별, 단체별로 날짜를 미리 찜해놓았기 때문에 각 단체들은 그날 한명이라도 더 인원을 맞추려고 

회원들 독려에 열중해있었지만 단 며칠 만에 수 백 명이 뚝딱 접수되는 것은 아니다.

갈까 말까 고민하는 사람, 가고는 싶은데 비용이 없는 사람, 일정조정이 안되는 사람 등

다양한 이유로 차일피일 명단 제출이 깔끔하게 완료되지 않은 채 조금만 시간을 더 달라는 요청이 빗발쳤다.

 

그러나 이틀 만에 북한 정부에서 신원조회를 끝내는 일도 촉박한 일이었으므로 당연히 북한의 재촉이 시작된다.

명단이 늦게 오면 관계기관에서 출입심사를 할 수 없고 심사가 끝나지 않았는데 초청장을 내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니 인원을 채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규칙과 시간을 지키는 일도 소홀히 하면 안 된다고 성화였다.

몇 번 재촉을 해도 소용이 없으면 나중에는 전부 불허할 수밖에 없다는 협박성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러면 나는 다시 서울로 전화를 걸어 명단을 빨리 보내라고 북의 잔소리를 재현할 수밖에 없다.

처음 평양에서 오는 전화를 서로 받으려고 아우성치던 서울의 겨레하나 사무실은

나중에는 서로 받지 않으려고 외면하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지역에서는 몇 시간만 몇 분만 더 기다려 달라고 하고,

평양에서 오는 전화는 지금 ‘당장’ 명단을 보내라고 소리를 지르며 재촉을 해대니 당연히 그럴 만도 하다.

 

그림. 서영준 화백

 

그런데 평양에서의 내 느낌은

서울에 있는 겨레하나 상근자들이 북한의 분위기를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이름 몇 개 적어 초청장이라고 보내주기만 하면 될 일을 왜 이틀 전에 명단이 올라가야 하는지 이해되지 않는 듯 했고,

그러다보니 너무 재촉하는 것 아니냐는 분위가 전달되어 왔다.

전화기를 통해 한명이라도 더 조직하려는 마음을 이해해주지 않는다는 섭섭함이 전해온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초청장 발송은 그저 서류상의 형식적인 절차 문제가 아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아직은 엄연히 군사적 대치상황에 있는 <대한민국>에서 오는 사람들을

신원조회도 하지 않고 평양 거리에 들어 보내는 상황을 방치할 수 있을까?

신원조회를 철저히 해도 자기네 정부를 비판하는 남쪽 관광객의 유인물이 발견되는 상황이다.

아리랑 관광도 중요하지만 테러가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고,

그런 일이 발생하면 북한의 국가안보도 중요하지만 남북관계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아무리 분단 60년 만에 이루어진 우리민족의 땅, 평양을 관광하는 일이라는 감격에 빠져있다 하더라도

북한은 이처럼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설령 몇 사람이 못 오는 한이 있더라도 신원조회를 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서울에서도 인식하고 각 단체에 시간을 엄수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서울 사무실의 온갖 비난의 눈초리를 감수하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발휘하여 명단 발송을 악랄하게(?)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사무총장님 평양에서 가 있다보니,

잠도 못자고 조직해서 보내는 우리의 심정은 전혀 헤아려 주지 않는다’

이런 심정이 아마도 당시의 우리 상근자들의 속마음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지금 생각하면 이는 당연한 과정이었지만 그때는 초단위로 마음이 정말 초조했다.

 

이런 일이 있었다.

어떤 분이 북한 입국 금지 명단이므로 평양에서 초청장을 내줄 수 없다고 했다.

나는 서울로 전화를 걸어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았다.

혹시 탈북자라던가 아니면 반북 활동경력이라도 있나?

알아보니 그분은 오랫동안 재야 통일 원로들을 후원해주신 분이란다.

나는 그 분을 추천한 사람들의 면면을 제시해가며 무슨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다시 알아봐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북으로부터의 반응은

입국 불허 리스트에 있는 사람과 단지 이름만이 같은 것이 아니라 생년월일도 같다며 재논의는 불가하단다.

난감했다.

북은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그 구체적인 이유를 밝혀주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이분을 빼라고 할 수 있을까?

서울과의 장시간의 전화 협의 끝에 이분을 추천해주신 원로 선생님들과 일일이 통화를 하고,

북에서 이름을 알만한 통일 원로 선생님의 강력 보증을 세우고나서야 결국 초청장이 나오긴 했지만 과정은 쉽지 않았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관광 시작 무렵에 날짜별로 주 예약단체를 미리 결정하는데 10월 6일에는 전혀 메인 단체를 발굴하지 못했다.

특단의 대책을 세우지 않는다면 개별인사 몇 사람만 태운 텅 빈 비행기가 김포공항을 이륙할지 모른다.

그러면? 그냥 겨레하나가 그날의 비용 적자를 감수하면 되나?

이 아까운 기회를 그렇게 보낸다는 게 말이 되나?

한사람이라도 더 많이 북을 다녀올 기회를 주어야 하는데, 평양 직항 공비행기라니.

이것은 자존심 문제였다.

 

또 하나, 나는 실망할 북한 사람들도 떠올랐다.

겨레하나로 온 관광객들은 다른 단체와 달리 모든 사람이 손에 한반도기(단일기)를 흔들면서 입장하였다.

아리랑을 참관하였던 평양 시민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무척 감격하였다.

우리는 그저 관광을 간 것이지만, 그 한반도기 덕분에

평양 시민들은 남쪽에서 온 모든 사람들은 다 통일인사라고 생각했고,

남쪽도 북 못지않게 통일을 열렬히 바라는 줄 이제야 확실히 알겠다며

정말 반가워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러다 보니 평양 시민들은 아리랑 공연 못지않게

한반도기를 들고 입장하는 남쪽 사람들을 환영하는 것이 큰 이벤트였는데,

그날 하루 한반도기를 든 부대가 입장하지 않으면 얼마나 실망할까?

또 남쪽 관광객을 위해 배치된 수많은 민화협 안내원들, 평양 관광 탑승 차량 기사님들,

양각도 호텔 접대원들을 생각하면 정말 난감한 상황이다.

어떤 대책이 있을까? 어떤 방법이...

 

그때 겨레하나 운영위원장이 낸 묘안이 효도관광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일하는 통일단체 실무자들의 부모님께 효도관광의 기회를 드리자!

어차피 뜰 비행기였으니 비행기 값 생략하고 아리랑 입장권과 호텔숙식비 정도만 받는다면

저렴한 비용으로 평양에 보내드릴 수 있겠다.

 

10월 6일 관광이면 명단은 4일까지는 제출되어야 한다.

10월 2일 정도에 방침을 결정하고 전국 통일단체 실무자 부모님의 효도 관광 참가자 모집사업에 들어갔다.

남쪽의 통일단체 상근자들이 우리의 이러한 결정에 환호하며

자신의 부모님을 비롯한 어른들의 효도관광 모집사업에 나섰는데,

이 또한 과정에서 녹록치 않은 장애가 발생하고 있었다.

 

시골에 사시는 부모님들이 많았고, 더러는 섬에 사시는 분도 있었다.

인적상황이야 자식들이 이래저래 보내주면 되지만 사진을 받아야 하는데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다.

시골에 사시는 노인들이 사진 스캔은 물론 이메일을 보낼 방법이 별로 없다.

갑자기 시골까지 내려가 부모님의 사진을 찍어서 올라오는 사람,

혹은 시골에서 부모님이 면사무소를 찾아가 직원들에게 부탁하여 자료를 보내주는 사람 등

별별 일들이 다 발생했다.

 

사진을 받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갑자기 보내오는 수많은 사진들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잘 가려서 연결시키는 것도

예상치 못한 고난도의 작업이었다.

이래저래 얼기설기 보내오는 전자사진을 보고 누구의 부모님인지,

그 사진을 보낸 실무자는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초단위로 시간을 재며 사진과 명단이 오긴 했지만 서류작업은 엉망진창일 수밖에 없었다.

 

그림. 서영준 화백

 

마침내 16일 순안공항에서 예견된 상황이 발생했다.

부모님들의 사진과 명단이 서로 바뀌어 신원 확인이 불가능한 상황이 발생했고,

순안 공항 입국대를 통과할 수 없는 분이 대략 7~8명 정도 생겼다.

원칙대로라면 그분들은 꼼짝 없이 그날 비행기 편으로 서울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북한 안내원들은 이 상황을 수습할 대책을 마련하느라 동분서주했다.

동승한 방문객 중에 신원을 보중해줄 지인을 찾기도 하고,

사진과 얼굴을 일일해 대조하여 바뀌어진 사진을 다시 바로 잡았다.

 

지금이야 여유롭게 이야기하지만 그 상황은 정말 진땀나는 상황이었다.

사실 외국에서 여권사진이 바뀌게 될 경우 입국을 상상하지 못한다.

그래도 여기는 평양이고 우리민족의 일이니까,

북한 분들도 문제를 해결해볼 실마리를 찾아 끙끙대고,

우리도 ‘설마...’ 하며 포기 하지 않은 채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를 기다렸던가?

민화협의 담당 책임자가 뒷덜미를 만지며 나타났다.

“총장선생, 내 목이 아직도 남아 있소? 이런 식으로 사업하다간 내 목이 몇 개라도 모자라겠습니다.

허허, 다 해결되었습니다, 이제 호텔로 돌아가지요!”

 

그때는 정말 전쟁이었다.

우리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금단의 땅에 하루 100여명을 관광으로 보내야 한다는 것!

통일부는 직원이 모자라 민간단체인 우리가 통일부에 자원봉사자를 보내서 업무처리를 도와야 할 형편이었고,

평양 상황실, 서울 겨레하나 사무실, 모든 것이 정신없이 돌아치고 있었다.

크고 작은 사건들이 꼬리를 물었고, 어쩔수 없이 남북교류초년생인 우리 모두는 이렇게 민간교류를 연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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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평양 양각도 호텔에서는 나를 아직도 <아리랑 대장>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2005년 9월말부터 11월 초까지 한달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양각도 호텔에 상주하면서

겨레하나 4000명 관광객을 비롯하여 만명이 넘는 남한 관광객을 지원하다 보니 붙여진 별명이다.

북한경험담의 앞부분에 그 당시의 각종 사건 사고 몇 가지를 소개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주로 <아리랑>공연을 소개하고 그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정리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아리랑’은 우리민족의 100년 역사를 형상화한 서사극이다.

민족의 정서와 넋이 담겨있는 민요 아리랑을 주제로 ‘민족의 운명사’와 세시풍속을 서사시로 표현한

 대집단체조이자 예술공연으로 100년간의 고난과 해방, 북한의 건국, 발전 과정을 보여준다.

각각의 내용은 10만 명이 참가하는 카드섹션 및 집단체조로 표현되는데,

여기에 화려한 빛의 레이저 영상이 어우러지면서 시각적으로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하얀 치마저고리를 받쳐 입은 여성들이 한반도와 제주도, 울릉도 모양에 이어 독도까지 만들어낼 때,

한쪽에서는 ‘우리는 하나’라는 웅장한 카드섹션이 펼쳐진다.

 

‘아리랑’을 보는 남한 사람들의 심정은 복잡하다.

그 스케일과 예술성, 집체성에 큰 충격과 감동을 받으면서도 형식과 내용면에서 고민이 생긴다.

 

우선 쉽게 제기하는 것은 인권 문제이다.

한창 뛰어 놀 고등중학교 학생들이 학업을 전폐하고 집단체조에 동원되어

배경대(카드섹션)나 체조대 연습에 매달리는 것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이런 집체의식은 과거 70∼80년대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시절의 전국체전 카드섹션이나

안보실기대회 제식훈련에 동원된 남한의 고교생들과 다를 바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림. 서영준 화백

 

 

공연의 규모나 짜임새만 보면

모든 것을 전폐하고 오랫동안 혹독한 연습에 올인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학교 수업을 받고 일상생활을 하면서 방과 후에 학교와 지역별로 나누어서 연습하는 것이지

10만 명이 한 장소에 갇혀서 수개월을 보내는 것이 아니다.

 

영국인 대니얼 고든이 만든 북한 다큐멘터리 ‘어떤 나라’를 보면

2003년 아리랑을 준비하는 2명의 여중생과 그 가족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열세 살 현선이와 열한 살 성연이는 김정일 장군님께 자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추운 겨울에도 강도높은 훈련을 하고, 때론 연습을 몰래 빼먹기도 하고, 늦잠 때문에 허둥대고 등교하기도 한다.

우리네 여느 10대 소녀들과 다를 바 없다.

 

물론 2시간 넘게 정신없이 카드섹션을 하면 정말 팔이 많이 아플 것 같다.

공연 도중 <울림폭포>라는 거대한 구조물이 무대배경으로 등장하는 시간이 있는데

그 뒤에 있게 되는 배경대 (카드섹션) 아이들이 팔을 좀 쉴 수 있겠다며 안심하시는 분들도 있었다.

아이들의 수고를 걱정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인지상정일 것이다.

북쪽 사람들 마음도 똑같다.

민화협 안내원들은 오전에 비가 와서 땅이라도 축축한 날이면

운동장에서 뒹굴며 마스게임을 해야 하는 꼬마 아이들 걱정에 숨이 깔딱깔딱 넘어가곤 했다.

 

그러나 고생이긴 해도 세계를 향해 그런 훌륭한 공연을 하고 있으며,

자기도 그 일원이라는 생각은 공연 참가자 누구에게나 긍지인 듯 했다.

내가 묵고 있던 양각도 호텔의 청소부 아주머니가

자기 딸도 아리랑 공연에 참가한다는 것을 어깨 으쓱해가며 자랑하신 적이 있다.

민화협 안내원들도 학생 때 카드섹션에 참여했단다.

그때 카드 뒤에서 살짝 고개를 삐죽 내밀고

다른 학교 아이들이 자신의 학교보다 더 잘하는지를 비교해 보다가 혼나기도 했다며,

힘들긴 했지만 즐거운 추억이라고들 이야기한다.

 

혹독한 연습과 훈련이 반인권적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누구도 올림픽 메달리스트들의 혹독한 훈련을 반인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단지 혹독한 훈련인가의 여부보다는

그 공연을 보고 곤혹스러워지는 본질적인 이유는 다른 데에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남과 북의 각기 다른 사회체제로 인한 사상 문화의 차이가 아닐까?

 

기꺼운 마음으로 이른바 ‘영예군인(상인군인)’들과 결혼하는 북한 여성들,

집단을 위해 개인을 희생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청소년들의 이야기는

개인 이기주의에 물들어있는 남한사회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따라서 개인은 전체를 위하고 전체는 개인을 위한다고 하는

집단주의 사회의 기본 특성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아리랑' 같은 대집단체조와 예술 공연을 이해할 수 없다.

 

내용면에서도 <아리랑>은 우리에게는 좀 낯설다.

우리 민족의 100년의 역사를 형상화하며 북한이 외세와 꿋꿋이 싸워 몰아내는 과정,

해방과 건국 그리고 분단, 이후 북한 사회의 과정을 민족적 정서와 한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미래를 개척해나가는 일심단결이 더해져 완성되는 줄거리는

우리가 학교 때부터 배웠던 역사하고는 완전히 다르다.

어느 쪽이 더 진실에 가까운지, 또 무엇에 공감하고 동의할 수 없는지, 혼란스러울 수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나는

장구한 세월 속에서 쌓여져있는 인식의 틀이 있는데

한 번의 공연을 보고 논쟁의 각을 세우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이야기한다.

중요한 것은 북한의 시각에 우리가 동의할 수 있는가 아닌가의 문제가 아니라

북한의 가치와 정서, 그리고 역사관이 어떤지를 살펴볼 절호의 기회로 생각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옳고 그름의 가파른 예각화를 떠나 다니엘 고든처럼 ‘어떤 나라’라는 시각으로

담담하게 <아리랑>을 볼 때, 얻을 수 있는 것이 훨씬 더 많지 않을까.

왜냐하면 북한이란 우리가 좋건 싫건 상관없이 화해협력하고, 통일해야할 상대방이니까!

 

화해하고 협력하려면 우선 상대를 알아야 한다.

상대를 알아야 어떻게 협상하고, 무엇을 조심해야

통일 과정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이 최대치가 되는지 기본 가닥을 잡을 수 있다.

북한에 대한 거부감과 북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서로 상충되지 않는다.

아직 이해되지는 않지만 그들의 생각을 존중하고 구동존이하려는 노력!

그것이야말로 통일의 긴 여정을 가야하는 우리 국민들의 몫이다.

 

혹자는 <아리랑>이 남한 사람들이 보기에 너무 부담스러운데

정치적으로 편안하게 다루어주면 안되냐는 문제제기를 하기도 한다.

그래야 보수든 진보든 많이 볼 수 있지 않느냐고 말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이해해야할 점은 애초에 <아리랑>은 남한을 의식해서 만든 것이 아니고

북한 자신을 위한 예술 공연이라는 사실이다.

북한은 자신들의 정신문화세계를 형상화하며,

그 과정을 통하여 어려운 상황을 헤쳐 갈 카타르시스와 위안을 얻는다.

서방세계와 남쪽 관광객들도 유치하려고 노력하지만

영리가 주목적이기보다는 북한만의 방식으로 ‘평화의 메시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 공연을 보고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관광객 각자의 몫이다.

 

<아리랑> 공연을 본 사람들의 반응은 정말 다양하다.

아이들의 인권 문제를 제기하며 한숨을 푹푹 쉬는 분들도 있고,

경제적으로 어렵다면서 저런데 돈을 쓰는 것이 옳으냐는 반론을 펴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한결같이 북한 주민들의 일심단결력, 그들의 사상, 그들의 문화에 대해

그전에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강한 충격을 느끼는 것도 일반적인 사실이다.

<아리랑>은 남한 사람들에게 ‘북한의 실체’를 알리는 커다란 영상으로 조용히 다가왔다.

 

다음번에는 아리랑 공연 관람과 평양 관광을 한 달 동안 지속하기위해 넘어야 했던 고비의 순간을 소개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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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남한 관광객을 가득 태운 전세 비행기가 서울과 평양을 날마다 오가던 시절이 있었다.

한달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평양을 관광하였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오늘은 그때 평양 관광이 시작되게 된 배경과 과정을 소개하겠다.

 

2005년 9월 13일부터 17일까지 겨레하나는 평양에 체류하고 있었다.

그때는 민간교류가 무척 활발하던 시절이었고 우리 팀 말고도 많은 대북지원단체들이 호텔마다 북적거렸다.

또 백두산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16차 장관급회담의 장소가 평양으로 변경되어

당시 정동영 통일부 장관도 평양에 있었다.

15일 저녁 갑자기 북한 안내원이 능라도 5.1경기장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북한이 자랑하는 ‘10만이 참여하는 대집단체조 아리랑’ 공연을 관람하자고 했다.

 

그때까지 남한 정부가 금기시하던 <아리랑>공연이라 관람해도 좋을지 걱정했지만

VIP석에 앉아있는 정동영 장관을 보고 안심할 수 있었다.

공연이 끝나고 북측 민족화해협의회는 뜻밖의 제안을 했다.

<아리랑>공연 기간 동안 남측 사람들의 평양 관광을 허용하며,

각 지원단체들에 모집 참가권을 주겠으니 최대한 많이 참가해달라는 내용이었다.

남한 정부의 승인여부를 걱정하는 내게 정동영 장관이 정부차원에서 적극 도와주기로 했으니 걱정 말란다.

 

 

 

그러면 잠시 아리랑 공연에 대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겠다.

 

2000년 10월, 대집단체조 <백전백승 조선노동당>공연에 왔던 미국의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인공위성 발사장면과 ‘우리를 건드리는 자 이 행성 위에 살아남을 자리 없다’는 카드섹션을 보고 기가 질렸다고 했던가?

그때보다 훨씬 다채롭고 부드러워진 내용으로 바뀐 대집단체조 <아리랑>은

10만 명이 한 치의 오차 없이 펼치는 대 집단체조 군무와 카드섹션으로 이미 세상에 알려져 있었다.

당시 미국이 9.11테러 이후 ‘테러와의 전쟁’을 구실로 대화를 중단하고 ‘악의 축’ 발언을 하는 등

북한에 대해 노골적으로 압력을 가하는 상황에서

북한은 <아리랑> 준비과정을 대내외에 공개하면서 서방 세계 관광객 유치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즉 북한은 '아리랑' 공연을 통해 국제사회를 향한 '평화 메시지'를 보내려고 의도했던 것 같다.

<아리랑> 관람에 남한 사람들이 대대적으로 참가한다면 세계를 향한 ‘평화의 메시지’의 여파는 더욱 커질 것이다.

자연히 북한은 그때까지 절대 불가하다던 남한 사람들의 평양관광을 한시적으로나마 열게 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아무나 신청만 하면 가능한 평양 관광은 남북관계 발전과 민간교류에 있어서 또 한번의 도약이었다.

남쪽에서는 그 누구나 한번쯤 가보고 싶어하던 평양임에도 불구하고,

문턱이 너무 높아 일반인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일반 여행사에게 모집권을 줄 수도 있지만

북한은 아직 상시적인 관광이 아니어서 서로간의 준비도 되어 있지 않고,

북과의 민간 교류경험이 많은 지원단체들을 중심으로 이사업을 제안하는 것이라고 했다.

 

겨레하나로서는 남한 방문객을 엄격히 제안하던 그 시절에

무작위적 관광을 허용한다는 제안도 무척 환영할 만한 내용이었지만

때마침 아리랑 공연을 한번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점점 많아지는 상황이어서

로또가 당첨된 심정으로 이 제안을 적극 수용하였다.

 

<아리랑>에 대한 남측의 평가는 사람마다 다르다.

<아리랑>은 집단주의 사회인 북한의 특성을 가장 잘 드러낸 작품으로,

일부에서는 어린아이들을 혹사시키는 반인권적 요소가 있다고 비난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높은 예술성과 대담한 스케일에는 혀를 내두르게 된다.

<아리랑>에 대한 시각의 차이는 다양하지만 우리와 화해 협력해야 할 동반자인

북한의 특징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남쪽 사람들도 꼭 한번은 보아야할 공연이다.

특히 그동안 남쪽 사람들이 인도지원 물품 분배 현장 확인 차 방북하여

북의 경제적 어려움만을 목격해 왔다면,

아리랑 공연 관광길에서는 북한의 강한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상대를 좀 더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이기도 했다.

 

얼마나 모집해 올수 있겠냐는 북 민화협의 질문에

직항 비행기로 약 15회 정도는 가능할 것 같다고 하자, 반색을 하며 당장 20일부터 첫 관광을 시작하잔다.

 

아이쿠.... 그 무슨 번개 불에 콩 구워 먹을 소리를!

우리가 서울에 도착하면 17일 저녁이며 그날부터 대한민국은 이미 추석휴가에 들어가 있는 상태다.

그 다음날 18일 일요일이 추석이므로 모든 업무는 이미 중단되어 있으며

빨라야 20일이나 되어야 출근과 모든 공적 업무가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모든 회의절차와 실무적인 일이 하루 만에 끝날리도 없거니와 더 큰일은 비행기를 구하는 일이다.

아시아나와 대한항공에 한 달 정도 쓸 수 있는 과연 비행기가 있을까?

아무것도 확인되지 않은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화를 치는 북한의 심정이 수긍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함께 있던 겨레하나 임원들도 직감적으로 이 사업은 무조건 빨리 내질러야 될 사업이라는 느낌이었다.

머뭇거리다가는 <아리랑>의 내용을 둘러싸고 보수언론의 집중 선제공격을 받을 수 있으며,

그럴 경우 아직 남쪽은 그를 제대로 방어할 수 있는 대책이 없다.

무조건 하루라도 빨리, 한명이라도 더 많이 보게 하여 시민들의 입소문으로 평양 관광의 흐름을 만들어내야 한다!!

 

대대적인 평양 관광, 그것을 가능케 하기위해 북한에 무엇을 요청해야 할까?

그때 불현듯 생각난 것은 평양에 임시 상황실을 개설하고 남북 직통 전화와 팩스선을 설치하는 문제였다.

하루 수백 명의 관광객 명단과 초청장을 주고받는 일,

사전에 차량과 호텔 객실을 배정하고, 확인되지 않은 신원에 대해 남북이 협의하는 등

모든 돌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남북의 직접 대화통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북은 대대적이고 신속한 평양 관광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동의해주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그날부터 정신없이 준비 작업을 몰아쳤다.

겨레하나 직원 한 명이 아예 아시아나항공에 눌러 앉아 없는 비행기를 내어달라고 생난리를 쳤다.

다행히 그때 장기 예약되어 있던 비행기 한 대가 예약이 취소되는 바람에,

좀처럼 해결기미를 보이지 않던 전세비행기 계약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갑작스레 진행된 대규모 관광객 유치와 그에 따른 실무적인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

수십 명에 달하는 자원봉사자를 모집했고 전화기 수십 대를 설치했다.

또한 관광 리플렛 제작, 관광객 교육 및 서류정리 등으로 겨레하나 사무실은 마치 전쟁터와도 같았다.

 

드디어 9월 26일!

겨레하나는 약 4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을 비행기에 태우고

한 달동안 계속된 평양역사문화유적과 아리랑 참관 사업의 첫발을 떼었다.

평양에서 제안을 받은 지 10일만이었고,

가운데 추석 연휴를 고려한다면 1주일도 채 안되는 기간에 전광석화 같이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 후 한 달 넘는 기간에 겨레하나를 비롯하여, 평화자동차, 지원단체들은

만 명이 넘는 인원으로 평양 관광과 아리랑 공연 관람의 붐을 이루어 냈다.

그리고 나는 그 사업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양각도호텔에 사무실을 내고

상황실장을 맡아 5명의 상근자와 함께 상주했다.

 

양각도호텔에 도착하여 가지고 간 팩스기를 연결하고, 전화가 개통되는지 점검부터 시작하였다.

그 시간이 아마 9월 26일 오후 1시경이었던 것 같다.

통화연결음 소리가 들리고, “여보세요. 여기는 평양인데요”하는 순간

전화기 저쪽에서 들리는 겨레하나 사무실의 엄청난 환성소리 “ 야 ! 평양이란다. 전화가 된다. 우와!”

서로서로 통화를 해보겠다는 아우성에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앞으로 닥쳐올 고생길이 구만리 같은데,

그 순간만큼은 우리는 전화기에 매달려 천진한 어린애들 마냥 감격에 겨워 어쩔 줄 몰라했다.

 

남한 사람들의 대규모 평양 관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후 언제 다시 그런 평양관광을 갈수 있을까?

 

우선은 금강산 관광재개가 시급하지만,

정권이 바뀌고 남북관계가 다시 재개된다면 그다지 먼 훗날의 일은 아닐 것 같다.

아리랑 공연에 대한 남쪽의 평가와 관광을 둘러싼 여러 가지 에피소드는 다음번에 소개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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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평양 거리를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취재할 수가 없어 불만이 많던 사진기사를 만난 일이 있다.

 

그는 이번 방북에 연인들이 자연스럽게 데이트 하는 장면을 찍고 싶다는 자신의 제안을

북이 받아줘서 “이게 웬 떡이냐?!” 기뻐하며 을밀대 공원에 갔는데

막상 가보니 ‘가공하지 않은 자연스러움’을 찍겠다는 꿈은 또 좌절되었다고 한다.

나무 의자에 다정히 앉아있는 노부부, 손을 꼭 잡고 걷는 청춘남녀 등 몇 쌍의 연인들이 있긴 했지만

동원된 티가 역력했단다.

좋은 옷을 차려입고 기자를 흘끔흘끔 바라보면서 데이트 하는 장면을 '연출'하는 바람에

기자는 실망하였고 ‘동원’과 ‘연출’을 각색한 북에 화가 나 있었다.

 

그림. 서영준 화백

 

 

사실 나도 평양시민의 삶의 표정을 카메라에 담고 싶을 때가 많았다.

을밀대 공원에서 주패놀이에 신명나게 푹 빠진 평양시민의 생생한 표정을 찍고 싶었던 적도 있으나,

북 안내원들의 시선을 의식하여 카메라 셔터를 누르지 못했다.

북한 사람 개개인의 자연스럽고 행복한 모습을 찍어 가면

남쪽에서 북한이 강제적이고 획일화된 사회라는 이미지를 극복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북한 분들에게 남측의 그런 시각을 이야기해주기도 민망하고

남한 언론에 북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사진이 공개될 것을 예민하게 경계하는

북의 고민이 이해되지 않는 바도 아니어서 그만두곤 했다.[각주:1]

 

북한이 획일화된 이미지 촬영만을 허용한다는 주장은 사실일까?

또 그 이유가 자연스러움을 외면하고 ‘북한 당국의 정책 홍보’만을 강요하는 분위기 탓일까?

 

사진이 ‘인간과 자연에 대한 생생한 장면’을 찾아내 표현해야 한다고 보는 점에서 남북이 다를 리 없다.

그러나 여기서 생각해보아야할 논점이 있다.

그것은 남과 북이 사진이나 문화예술 분야에서 추구하는 내용과 방식의 차이는

<자유스러운 개성과 순수함>이냐 <정책홍보성>이냐의 차이가 아니라,

무엇이 생생하고 자연스러운 것인가에 대한 관점의 차이로부터 발생한다고 봐야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어느 것이 우리 식의 잣대로만 북을 평가하는 것이 아닌

북한 사람들의 감성과 진정성으로부터 사물을 보는 내재적 접근일까?

 

북한은 사회현실 속에서 부대끼고 살아가는 구체적인 표현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남쪽의 개인의 개별적 감수성의 영역, 개인과 개인의 갈등을 주로 다루는 영역,

사회현상과 무관한 개성적인 표현과 주장을 선호하지 않는다.

 

특히 북한을 고립 압살하려는 서방의 정치적 경제적 봉쇄를 뚫고

<나라의 안보>를 지키며 <강성대국- 경제강국>을 건설해야 하는 기세와 맞물려 더욱 그런 분위기가 강한 것 같다.

 

그러다보니 사진 한 장, 그림 한 점에도

사회를 개조 건설 하기위해 고군분투하는 인간의 삶과 열정을 표현하는 것에 주력하며,

풍경화에 조차 <우리 민족, 우리 강산 제일주의>의 기치가 반영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분위기인데 남쪽에서 분단을 넘어 오신 분들이 기껏 데이트 하는 장면 혹은 주패놀이 하는 장면이나 찍겠다니,

너무 철이 없지 않느냐고 보는 것이 아마 북의 시각일 것이다.

 

또 한 가지 우리가 고려해야 할 점이 있다.

북한은 남쪽 사람들이 다듬어지지 않은 평양의 모습을 무작위로 찍는 것에 늘 민감하다.

자칫 헝크러진 북녘 사진 한 장이 남쪽 언론에 공개되어

틈만 있으면 반북기사를 써대는 보수언론에 자료사진으로 이용될까봐 민감하게 경계한다.

남쪽 사람들이 헝크러진 사진을 찍으려는 것이 아니라고 항변하지만

신나게 주패놀이를 하는 시민의 표정조차, ‘대낮에 공원에서 도박’하는 사진으로

보수 언론에 보도될 것을 경계하는 북을 안심시킬 방도는 사실 없다.

 

이런 이야기를 할 때면 웃지 못할 한 사건이 생각난다.

‘아리랑 공연 참가단’으로 연일 수천명의 남쪽 관광객이 평양에 올 무렵,

대학생 참가단이 평양에 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 한 학생이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대뜸 순안공항 위생실(화장실)부터 찍다가

청소하시는 아주머니에게 들켜서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문제를 일으킨 학생은 학생회 대표로서 북에 온 학생 사진 기자였는지 몰라도

북에 와서 자기 딴에는 자연스러운 삶의 현장 여러 곳을 찍어 학우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하긴 화장실이야 말로 아무도 돌아보지 않으면서도 가장 일상적인 생활의 소재니까!

그러나 북한의 관계기관에서는 무척 흥분하여

“학생회 간부라면서 왜 좋은 곳을 다 놔두고

하필 어둡고 후미진 위생실을 찍는 이유를 도무지 납득할 수 없다”며 조사를 벌렸다.

조사하는 몇 십 분 동안 그 비행기로 같이 왔던 수 백 명의 발이 영문도 모른 채 공황에 대기해야 했다.

 

그 때 하루 1000명도 넘는 남측 관광객을 북에서 초청한 이유는

아리랑 공연을 비롯하여 평양의 가장 아름답고 자랑찬 모습을 보여주려던 의도였던 만큼,

학생회 대표로 왔다던 학생이 대뜸 위생실 촬영부터 하는 일이 어이없을 법하다.

참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 학생도 이해가 되고 새파랗게 질렸던 북쪽도 이해가 갔다.

이렇듯 남북의 인식 차이가 사진촬영을 둘러싸고도 늘 아주 예민하게 엇갈린다.

 

북을 드나드는 남측 사람들은 자신의 카메라를 순안공항이나 개성, 금강산 CIQ에서 일일이 검사하는 것을

심각한 프라이버시 침해로 여기고 화를 내는 분들이 많다.

그럼에도 이러한 북의 시각과 고충을 이해한다면 다소라도 마음이 좀 편해지지 않을까 생각된다.

남북의 대치상황을 고려하면 자신이 당한 인권침해 의식으로부터 한발 물러설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지 않을까?

 

다시 위의 사진기자의 예로 돌아가 보자.

남북의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인식에 대한 차이, 문화예술에 대한 관점의 차이,

또 남이 잘 모르는 북의 내부 정서 대한 차이를 간과하고,

그저 자연스러운 데이트 장면을 찍겠다는 그 기자의 요구가 북으로서는 얼마나 난감했을까?

 

북 안내원은 기자의 바람이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내 경험으로 남쪽 사람들이 들이미는 카메라 앞에서 자연스러운 포즈를 취할 수 있는 평양 사람은

장난기가 철철 넘치는 개구쟁이 남자 아이들 뿐이었다.

본인의 얼굴이 찍힌 사진이 어떻게 사용될지도 모르면서

그저 일상적인 표정을 지어보일 수 있는 평양 시민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북의 안내원은 북녘 동포들의 생생한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잡지에 내고 싶어 하는 그 기자의 마음을 애틋해 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이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데이트 족을 <동원>하고 <연출>하는 눈물겨운 배려를 해준게 아닐까?

 

그림. 서영준 화백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그날 동원된 데이트 족은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왜 자신들이 남쪽의 기자를 위해서 그렇게 포즈를 취해야 하는지,

그게 어째 통일에 유리한 것인지 모르겠다며 항의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을 설득하느라 북측 안내원들은 애를 먹었을 지도...

 

기자의 행동은 어쩌면

남한 사람들에게 ‘있는 그대로의 북’이 아닌 ‘남쪽이 보고 싶어하는 북한의 형상’만 보게 하는 것 아닐까?

그것이 <민족의 동질성>을 확인하는 최선의 방법일까?

남북이 더 화해하고 협력하기를 바란다면

지금의 남북의 차이를 좀 더 객관적으로 제시하고 다양한 분석의 틀을 소개하되,

그에 대한 판단을 남쪽 사람들의 입장에 맞는 다양한 해석에 맡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남북의 동질성을 확인하는 작업을 <북한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만으로 이루던 시기는 지났다.

그리고 그것이 글재주가 미천함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좌충우돌 북한경험담을 쓰는 진정한 이유이기도 하다.

 

 

 


  1. 북이 남쪽 사람들의 개인 카메라를 그렇게 통제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그것이 남쪽 언론에 보도되어, 반북한용 홍보자료로 활용되는 것에 대한 우려이며, 이는 실제로 현실성이 매우 높다, 그러므로 북은 남쪽 방문단에 대하여 언론에 보도되어도 절대로 악용되지 않을 사진촬영만을 허용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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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10만이 참가하는 대 집단체조 아리랑’ 공연이 진행되는 한 달 내내

평양 양각도 호텔은 남쪽 손님들로 시끌벅적 했다.

남과 북의 풍속과 생활습성이 달라,얼마나 많은 일들이 발생했는지....

 

그 중 하나가 욕실 사용 문제였다.

남쪽 손님들이 묵은 객실마다 욕실 바닥의 물이 넘쳐

침실 양탄자가 물에 흠뻑 젖는 일이 비일비재 발생하였고,

제때 갈아주지 못한 양탄자에서는 곰팡이 냄새가 풍겨났다.

 

사실 내가 처음 평양에 왔을 때도, 이런 실수를 했었다.

무심코 머리를 감고 나니 욕실 바닥이 온통 물바다가 되어 있었다.

평양 욕실에는 바닥에 배수구를 아예 설치하지 않은 탓이다.

물난리가 나고 나서야 배수구 문제를 알게 되었고

‘북한이 얼마나 돈이 없으면 배수구 시설조차 아껴야 했을까’ 싶어 내놓고 투덜거리지도 못하고

넘친 물을 수건으로 연신 빨아내어 가까스로 수해(?)를 막았었다.

 

그날 저녁 식사 때 그 이야기를 하자.

 

함께 왔던 신부님께서 평양만 그런 게 아니라, 유럽에도 욕실에 배수구가 없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유럽 사람들은 욕조 안에서만 물을 쓰는 것이 습성화 되어있어,

욕실 바닥에 배수구를 따로 설치할 필요가 없단다.

남한이 미국문화에 영향을 받은 것과 마찬가지로 북한은 러시아, 동구라파의 풍습에 영향을 받고 있다.

 

서울 목욕탕의 풍경이 생각났다.

우리 어머니는 뜨거운 물이 풍성한 동네 목욕탕에 가면

속옷 한 가지라도 더 빨아치우려고 아둥바둥했고,

더운 물을 팍팍 퍼부어 대면서 목욕비 투자 대비 만족도를 최대한 높이려고 하셨다.

우리네 욕실 풍습은 바닥에 편하게 앉아 때를 밀면서 물을 펑펑 부어내는 것이 아닐까?

점차 샤워부스나 욕조에서 간단하게 샤워를 하는 것으로 바뀌고 있지만,

욕실바닥에 배수구가 당연히 있는 조건에서 욕

조에 커튼을 안으로 드리우고 조심조심 샤워를 하는 일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림. 서영준 화백

 

하루 1000명 이상의 남한 손님들이 빚어내는 욕실 사고는

양각도 호텔 측으로서도 감당하기 어려운 대형 사고일 수밖에 없었다.

양각도 호텔 측의 빗발치는 항의가 우리 상황실로 쏟아져왔다.

남쪽 손님들이 모든 호텔 객실을 물바다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난감 난감... ㅠㅠ

 

남쪽 분들에게 욕실 바닥에 배수구가 없다고 조심하라고 하면,

사람들은 북한이 후지다고 투덜거릴 것이 뻔하다.

나름 비싼 돈을 내고 관광을 왔는데,

국제급 호텔이라고 해놓고 시설이 낙후되었다고 생각한다면 별로 기분 좋을 일이 아니다.

그 유쾌하지 않은 기분을 남쪽에 내려가서 입소문으로 풀면,

힘들게 마련된 평양관광의 붐에 차질을 빚을지도 모른다.

또 남쪽 사람들의 투덜거림을 북측에서 듣는다면 그 또한 기분이 좋을리 없다.

그러니 단순히 조심하라고 할 것이 아니라,

남쪽 사람들이 북한의 시설낙후문제로 바라보지 않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또 이런 문제를 아무리 사전교육 한다고 하더라도 몸에 밴 목욕 습성을 고칠 수는 없을 것 같아

방방마다 욕실 문 앞에 대문짝만하게 큰 글씨로 인쇄물을 써 부쳐야겠다고 생각했다.

 

 

양각도 호텔은 유럽식이라 욕실 바닥에 배수구가 없습니다.

욕조 안에서만 물을 사용해 주십시오

-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

 

 

 

 

 

 

라는 내용의 인쇄물을 만들어 상황실 직원 8명이 팔을 걷어 부치고 해결할 결심을 하였다.

호텔 프론트의 힘을 빌리지 않고,

층층이 청소하시는 아주머니들의 도움을 받아 방을 따고 들어가 인쇄물을 붙이는 방식이었다.

북측 도움 없이 상황실 직원들의 힘만으로

수 백 개의 방에 인쇄물을 붙이는 일을 조용히 해결한 우리의 열정에 스스로 감탄, 만족해하는 순간

갑자기 민화협 담당 선생이 달려오더니 목청을 높였다.

양각도 호텔 측에서 남측 상황실 일꾼들이 자기들의 동의도 없이 객실마다 헤집고 돌아다닌다고

항의가 들어왔다는데 ‘이경 선생이 이렇게 제멋대로 질서를 어지럽힐 줄 몰랐다’며,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아... 또 어떻게 설명하나?

양각도 호텔 측에 미리 양해를 구하지 못한 것을 설명하기가 좀 난감하다.

할수 없이 또 장황하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설명하자 점차 눈꼬리가 부드러워지더니

급기야 ‘정말 수고가 많다. 그렇게까지 사려 깊은데 놀랐다’는 치하(?)의 발언까지 해주며 돌아갔다.

 

아! 정말 평양에서의 모든 상황은 그 자체로 돌발 변수다,

물을 욕조 안에서 쓰는가 아닌가 같은 생각지도 못한 일들까지

한바탕 소동을 피워야 할 줄이야 차마 예상치 못했다.

 

인쇄물을 붙인 뒤로 욕실 바닥에 고인물이 침실로 범람하는 소동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인쇄물의 효용이 크다고 판단한 양각도 호텔 측에서는  그 인쇄물을 그 뒤로도 1년 이상 수거하지 않고 붙여 두었고,

덕분에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가 마치 양각도 호텔에 상설적으로 사무실을 두고 있는 듯한 착시효과가 있었다.

 

광고비 내지 않은 우리 단체의 홍보효과가 최고! 남과 북 민간의 갈등해결사 겨레하나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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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식사배달’은 남쪽 사회에서 일상적인 일이다. 자장면 신속배달 시스템은 아마도 세계 최고일지 모른다.

평양에서도 전화로 식사를 배달시켜 먹는 경우가 많을까? 그러면 금방 오나?

궁금할 수도 있는 문제였지만 그런지 안그런지 막상 접할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2006년 9월 말부터

<평양 문화유적 답사>와 <10만이 참여하는 대 집단체조 아리랑>공연 관람을 위한

남측 관광단의 대대적 초청사업이 한 달 이상 진행되었다.

하루 1000명이 넘는 남측 관광객들의 평양 관광 안내와 기타 여러 가지 업무지원을 위해

상황실이 설치되었고 나는 상황실장을 맡게 되었다.

아시아나와 대한항공의 점보급 비행기 3대가 하루 1000명씩을 쏟아내고

다시 그만큼을 싣고 가는 일들이 진행되는 동안, 양각도 호텔의 상황실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평양 상황실과 남쪽 겨레하나 사무실을 잇는 직통전화가 개통되어 수백 명의 참가자 명단을 팩스로 받고,

그에 대한 초청장을 북측 해당기관으로부터 받아서 남측 겨레하나에 보내주는 일이 매일 반복되었다.

또 비행기가 평양에 도착할 시간이면 순안공항에 마중을 나가고, 평양 관광에 앞서 기본 교육을 하고,

호텔 방을 배정하고, 북과 논의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안건을 정리하여 만남을 주선해주기도 하고...

분단이래 남쪽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북에 오는 것은 처음있는 일이었고, 그에 따른 사건사고가 연일 터졌다.

우리 상황실 직원 6명은 매일 초단위로 터지는 돌방상황에 대처하느라 이리저리 뛰어다녀야 했다.

그때 발생한 이른바 평양의 초 메머드급 사고는 다음 편부터 몇 번에 걸쳐 소개하기로 하고,

오늘은 일단 운반식사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겠다.

 

그림. 서영준 화백

 

아무튼 그때 너무 바빠서, 식당으로 내려가 밥을 먹을 형편이 못되었다.

서울에서 같으면 사무실 직원에게 ‘김밥 한 줄만 사다 달라’고 한다던가 했을텐데...

이런저런 궁리를 하면서 불현듯 신속배달 동네 중국집이 그리워졌다.

‘아 그렇지! 여긴 자장면은 아니어도 룸서비스는 될지도 몰라!!’하며

프런트로 전화를 걸어 룸서비스가 가능한지 물었다.

프런트 담당직원은 “아 운반식사요? 네 가능합니다. 인차(남측의 '금방'이라는 뜻) 가져다 드리겠습니다”고 하였다.

나는 이제 곧 식사가 오면 몇 숟갈 뜨고 빨리 나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주문한 시간이 5시 쯤이었는데, 인차는 무슨 인차!

30분이 지나고 1시간이 지나고 2시간이 다 되어가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다.

남쪽에서 우리가 흔히 배달시켜 먹는 짜장면은 좀 과장해 말하면,

전화를 끊기도 전에 벌써 음식이 도착한다고 하는데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을까?

깜박 잊어먹은 것이 아닐까? 설마...

재촉전화를 하지말고 믿고 기다려야지 하며 참고 참다가 나는 그날 결국 저녁식사를 포기하고 상황실을 나서야 했다.

급한 일들을 해결하고 밤 9시가 다 되어 올라오니 텅빈 상황실에 다 식어버린 식사가 덩그마니 놓여 있었다.

다음날도 하루 종일 잊고 있었다가 저녁 식사 무렵 다시 룸서비스를 빨리 가져다 달라며 신신당부를 하였는데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아! 더 이상은 못 참겠다.

나같이 중요한 단골(?) 고객의 입장을 이렇게 무시하다니!!! 정말 부화가 치밀었다.

‘5분 내로 도착하는 자장면’을 상상했는데, 양각도 호텔이 나같이 중요한 고객에게 불친절하다니!!!

(그때 양각도 호텔 측은 하루 1000명의 손님들을 전부 내가 초청해 오는 줄 알고 있었으니,

사실 따지고 보면 나는 정말 중요한 VIP 중에 VIP 아니겠는가? )

사흘째 되던 날은 더 이상 프런트에 전화하지 않고, 식당으로 달려갔다.

 

얼굴이 낯이 익은 접대원 동무에게 격렬하게 따지고 싶은 마음은 강렬하였지만,

그래도 나름 침착하고 우아한 모습으로 ‘운반식사가 늦어져 저녁을 계속 굶었는데 왜 이렇게 늦어지는지,

좀 신경 써서 가져다 줄 수는 없는지,

근데 그러기 위해서는 프런트가 아닌 식당의 책임자 누구한테 이야기하면 되는지’를 나름 점잖게 물었다.

나는 그렇게 차분하게 물어보면, 그 접대원동지가 깜짝 놀라고 많이 미안해하며,

“내일부터는 주문 즉시 바로 가져다 드리겠다”고 답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북쪽의 접대원들은 무척 친절하므로, 식사 운반이 늦어져 고객이 밥을 굶었다니 얼마나 미안해할까?

저 예쁜 접대원 동무가 쩔쩔매며 이야기하면

 나는 가볍게 미소를 띄며 내일부터는 신경써 달라고 여유있게 이야기해야지...

그런데 그 접대원 동무의 반응은 완전 달랐다. 완전!!!

 

  그림. 서영준 화백

 

너무 별일 아니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 식사가 늦어서 문제이십니까? 그러시다면 몇 시까지 가져다 달라고 주문해주시면,

딱 그 시간에 식사가 갈 것입니다. 내일은 몇시까지 갖다 주면 됩니까?”

이 얼마나 황당한 시츄에이션인가!

운반 시간까지 예약주문하면, 일없을 거라는 반응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돌방상황이었다.

단단히 마음잡고 따지러 간 나만 뻘쭘해지고....

톡톡튈 만큼 상큼한 모습으로 이야기하는 접대원동지를 보며,

방금까지 내가 무엇을 가지고 화를 참고 있었는지....

갑자기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묘한 처지가 되어 버렸다.

 

사실, 식사 운반시간을 미리 예약해 놓는 것은 의미가 없다.

연일 예상치 못한 사고가 빵빵 터지는 조건에서 언제 어디로 달려가야 할지,

언제 짬을 내어 급하게 밥을 시킬 수 있을지 모르는데 식사 운반시간을 예약하다니???

이건 해결 방법이 아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 갑자기 운반식사를 몇 시까지 가져다 달라는 뜻이 아니었다고 한다면 저 접대원 동무는 뭐라 할까?

북의 시스템이 원래 그렇게 되어있는 것 같은데 갑자기 전화해놓고,

‘빨리 빨리’를 외친들 그게 실현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 같았다.

또 이제와서 운반식사를 안하겠다고 하면 더 이상할 것 같아

별 수 없이 “날마다 6시로 해 달라 ”고 하는 정도로

시간 예약주문으로 입장을 말해놓고 돌아서면서 나는 금새 후회하기 시작했다.

‘저녁을 굶어야 하기는 마찬가지일 것 같은데, 괜히 저녁식사 값만 계속 나가겠군’,

‘그냥 빵이나 몇 개 사다 놓을 걸’ 하면서....

 

그 뒤로 더욱 곤혹스러운 사태가 발생했다.

날마다 6시면 거의 1분도 틀리지 않고 상황실로 운반식사가 날라져 왔고,

그 시간에 맞춰 밥을 먹을 형편이 되지 못했던 나는

주구장창 밥이 식어서 도로 내어놓는 일이 10일 이상 지속되었다.

이를 취소하자면, 또 누구한테 어떻게 이야기하면 되나?

 

그림. 서영준 화백

 

평양에서는 룸서비스, 식사배달 같은 일들이 일반화되어 있지 않고,

그러다보니 당연히 시스템화되어 있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운반식사’가 불가능 한 것은 아니므로

갑자기 손님이 프런트에 주문을 하면, 프런트에서는 식당에 연락을 하고,

식당 접대원들은 다시 지배인에게 이 문제를 보고하여 음식을 제작할지 말아야 할지,

결제를 기다려야 하니, 두 시간 이상 걸리는 것은 당연하다.

실제 운반식사로 배달되어온 쟁반의 내용을 보니, 운반식사용으로 따로 제작된 것 같았다.

 

그런데 이런 남과 북의 차이를 모르거나 체질화 되어 있지 않은 남쪽 방문객들에게

북의 운반식사는 정말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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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