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중접경지역. 고백하건데 겨레하나에게 접경지역은 지극한 관심의 대상이 되지는 못했다. 평양, 개성, 신의주, 백두산, 금강산... 인도적 지원을 매개로 통일운동을 해온 우리단체가 시민들에게 소개할 곳은 많았고, 2004년 아리랑 관광이후 한 해 한 번씩 서울에서 출발해 평양으로 가는 직항기를 띄우는 일이 연례행사였기 때문이다. 중국으로 백두산에 오르다니, 우리 땅으로 오를 수 있는 길이 있는데!

 

남북관계가 바닥을 모르고 곤두박질치고 있는 동안 우리는 남과 북, 통일을 느낄 수 있는 현장에 목마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디를 둘러봐도 격앙된 목소리들 뿐, 역사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미래에 대한 건강한 희망을 이야기할 곳은 없었다.

 

그렇게 결심하게 된 조중접경지역 답사. 어찌 보면 단순한 출발이었지만 접경지역이 품고 있는 우리 민족의 역사와 미래 앞에서 우리는 숙연해지고 말았다. 지금은 남과 북이 품고 있지 못한 역사의 땅이자 동아시아의 미래를 결정할 위기와 기회의 땅, 조중접경지역 현장에서의 소회를 전하고자 한다.

 

1. 동아시아의 전쟁, 식민의 역사가 새겨진 곳, 대련

2. 조중 친선, 무역의 현장, 단둥

3. 민족이 걸어온 길, 그리고...백두산

4. 남북경협, 동북아의 미래, 도문-훈춘

 

 

압록강 따라 1500km 동아시아의 역사와 현재를 보다 4

접경지역, 우리 밖에서 우리를 들여다보는 힘

 

겨레하나 교육문화센터 휴H.U.E 이연희 활동가

 

 

코리언 디아스포라. 10만이 넘는 이산가족에게 조차도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간혹 TV를 통해 이산가족의 상봉을 지켜볼 때 우리에게 아픈 과거가 있었음을 잠시 상기할 뿐. 사실 우리 사회에서 ‘민족’은 낡음, 구태의연함, 그래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옷쯤으로 치부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런데 막상 이국에서 마주하게 된 민족의 흔적은 어느 때보다 ‘민족’을 고민하게 했다.

 

중국에 살고 있는 조선족은 약 2백만명으로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분류한 56개 민족 중 16번째로 많은 숫자다. 그 중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살고 있는 조선족이 약 80만명. 그런데 해마다 인구가 줄어서 자치주 건립초기인 70.5%를 차지했던 조선족 인구비율은 지금은 36.5%로 낮아졌다고 한다. 소수민족 비율이 30%를 밑돌면 자치주가 해제될 위험이 있어서 지금처럼 인구 감소추세가 계속되면 연변이 자치주 지위를 잃게 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연변자치주 인구가 이처럼 줄어든 데는 출산율 감소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 학업, 취업 등을 이유로 자치주를 떠난 사람들이 많은데서 비롯된다. 그중 한반도 이남, 대한민국에 들어와 사는 조선족이 약 47만명쯤이다.

 

연길의 밤거리. 최근 한국식 노래주점, 단란주점이 늘어나고 있다.

 

2,3년 새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는 노래방, 노래주점, 단란주점...간판조차 한국말인 연길의 현란한 밤거리가 우리 도시 어디쯤과 매우 닮아 있는 것이 씁쓸하게 다가오는 한편으로 그들은 우리에게 우리는 그들에게 무엇일까를 생각해 본다. 그들이 가진 국가정체성은 중국이지만 한민족이라는 민족적 정체성을 부정할 수 없으리라.

 

“중국조선족애국시인 윤동주”

 

명동촌 대성중학교와 윤동주 생가를 방문하는 것으로 답사 마지막 일정을 시작한 우리 일행은 윤동주 생가 앞 비석에 새겨진 “조선족 시인 윤동주”라는 문구에 말을 잃었다. 최근 윤동주 생가를 새 단장하는 과정에서 세워진 비석이라고 한다. 중국은 우리 민족시인 윤동주를 중국인, 소수민족의 시인으로 기억하려는 것이다.

 

윤동주 생가 입구 ‘중국조선족애국시인’이라고 씌인 비석

 

명동촌 대성중학교에는 일제 치하에서 조국을 되찾기 위해 이국땅 간도에 학교를 세우고 독립군을 무어 싸우던 선열들의 역사가 보존되어 있었다. 용정의 대성, 은진, 영신, 동흥 등의 중학은 일제강점기 수많은 항일애국 지사들을 양성한 민족교육의 중심지였다. 항일독립의 뜻을 둔 겨레의 젊은이들이 조선에서 러시아 연해주에서 동북의 남북과 북만에서 용정으로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윤동주, 문익환, 이상설...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이름부터 리종옥, 김책, 리동광 등 항일무장투사들에 이르기까지. 용정은 우리가 품지 못하는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용정 명동촌 대성중학교. 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조선족 해설사의 이야기를 듣고있는 참가자

   

일제하의 이산은 ‘식민화’가 가져온 결과였지만 일제 식민지배가 분단으로 고착되면서 민족의 이산문제는 지금까지 방치되어 왔다. 재중 조선족이나 재러 고려인, 재일 조선인이나 탈북자들은, 민족적 동일성을 향한 욕망이 클수록 한국이나 한국인들에게서 더 많은 상처를 받는다고 한다. 우리가 자신들을 ‘형제’로 바라봐주길 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한민족인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사회의 시선은 그리 따뜻하지만은 않다. 한국인들이 코리언 디아스포라 가운데서 특히 ‘재미동포’와 ‘재중동포’를 차별대우하고 있다는 사실에 이르면 부끄럽기까지 하다.

 

코리언 디아스포라의 역사를 제대로 수용하고 있지 못한 우리의 현실을 생각하면 조선인의 역사를 자기 소수민족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중국을 탓할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윤동주 생가를 떠나 일행이 도착한 곳은 두만강 상류에 위치해 있는 도시 도문. 약 521km길이의 두만강은 북한과 중국, 러시아의 국경을 나누는 강으로 중국에서는 도문강으로 불린다. 중국 도문과 북한의 함경북도 온성군 남양시가 도문대교(투먼타차오)로 연결되어 있다.

 

노래에서 듣던 것과 달리 두만강은 온통 흙탕물. 전날 백두산에 비가 내려 그렇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중국의 상류개발 때문이라는 게 정설인 듯. 본래 두만강 유역은 임산자원이 풍부한 임야지역으로 두만강 재(材)라 불리는 뗏목이 특히 유명하다고 한다. 강의 결빙기(11월 하순에서 3월 상순까지)를 피하여 하류인 회령까지 목재를 유송(流送)하였으나 무산선과 백무선 등 삼림철도의 개통으로 지금은 육지로 목재운송이 이루어진다.

 

전에는 목재를 나르던 그 두만강 뗏목을 타고 손에 잡힐 듯 가까운 북녘 땅을 다시 한번 건너다본다. 압록강에서처럼 가까이 우리 땅(?)을 두고도 쉽게 넘나들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두만강 뗏목, 중국 도문과 북한 온성군을 잇는 도문대교가 멀리 보인다.

 

이제 답사의 마지막 코스인 훈춘.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동쪽에 위치한 훈춘은 남쪽은 두만강을 경계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라선직할시에, 동쪽은 러시아 프리모르스키 지방(연해주)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북중러 3국 접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에 오르니 저 멀리 동해가 눈에 들어와 박힌다. 낚시하는 러시아의 농부와 아이들도 보인다.

 

새삼 우리가 알고 있는 국경은 가시 박힌 철조망뿐이었음이 떠올랐다. 물론 이곳에도 중국과 러시아를 나누는 철망이 있긴 했지만 절대 접근해서는 안 되는 어떤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그렇게 휴전선, 가시박힌 철조망으로 우리의 상상력조차 가두고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

 

훈춘의 조중러 3국접경 전망대

 

사진 오른쪽이 러시아, 왼쪽이 조선. 멀리 동해가 내다보인다.

 

사실 이번 답사의 마지막 코스로 훈춘을 택한 것은 우리 답사의 주요 테마 중 하나였던 ‘남북교류협력의 미래’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었다. 북한과 중국, 러시아 3국이 접한 훈춘은 앞으로 남북한과 중국, 러시아를 연결하는 물류 허브로서의 역할, 기대가 높은 지역이다. 특히 북한의 나진항과 청진항으로 통하는 직행로가 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중국이 훈춘을 국제합작시범구로 지정하고 대대적인 투자를 준비하고 있는 것은 나진항 이용이 일대 물류혁명을 가져올 것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동북지역 화물을 나진항을 통해 중국남부로 운송할 경우 엄청난 비용을 절감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미국과 일본으로 가는 최단 거리를 확보할 수 있다.

 

중국의 장지투(창춘-지린-투먼·훈춘)개발계획, 러시아의 극동개발계획, 러시아와 중국의 나진항 진출, 북중러 자유관광지구 지정 등이 보여주는 것처럼 중국과 러시아, 북한은 접경지역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과 미래에 큰 기대를 걸고 있는 것 같다. 간단히 떠올려 봐도 시베리아 횡단철도(TST)와 한반도 종단철도(TKR) 연결, 남북러 가스관 연결 등 남·북 경제협력과도 이해가 맞물려 있다.

 

조중러 접경지역 전망대에서 함께 한 답사참가자들.

   

하지만 막상 북중러 접경지역에 이르니 ‘교류협력의 미래’보다 답사기간 내내 우리를 아프게 짓눌렀던 무언가와 더 또렷하게 만나게 된다. 우리가 보고 느끼고자 했던 미래는 처음부터 거기 없었는지도 모른다.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극복해야만 하는 것, ‘분단’이 거기 있었다.

 

우리 삶의 현장에선 너무 멀게만 느껴졌던 ‘민족’, '이산‘이라는 말을 고스란히 삶으로 품고 있는 사람들, 머지않아 사라져버릴지 모를 우리의 역사유적들, 우리가 알아서도 기억해서도 안 된다고 배워온 근현대사의 다른 기록, 그리고 지금은 가볼 수 없는 북녘 땅.

 

접경지역에는 우리 밖에서 우리의 과거와 현재를 들여다보게 하는 힘이 있었다.

전쟁, 식민, 이산, 분단으로 얼룩진 민족의 근현대사와의 만남은 때로 불편했으며 ‘우리는 지금 무얼하고 있는가’, 애통하고 답답하기도 했다. 하지만 평화, 공존, 통일의 새로운 미래를 설계하기 위해 반드시 마주해야 하는 현실임을 깨닫는다.

 

‘분단’만큼이나 여전히 ‘통일’은 멀고 어렵다. 접경지역에서 만난 분단과 민족을 잊지 않기를. 그래서 작은 힘이나마 분단극복을 위해, 새로운 역사를 위해 손맞잡고 머리를 맞댈 수 있기를 기원하는 마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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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조중접경지역. 고백하건데 겨레하나에게 접경지역은 지극한 관심의 대상이 되지는 못했다. 평양, 개성, 신의주, 백두산, 금강산... 인도적 지원을 매개로 통일운동을 해온 우리단체가 시민들에게 소개할 곳은 많았고, 2004년 아리랑 관광이후 한 해 한 번씩 서울에서 출발해 평양으로 가는 직항기를 띄우는 일이 연례행사였기 때문이다. 중국으로 백두산에 오르다니, 우리 땅으로 오를 수 있는 길이 있는데!

 

남북관계가 바닥을 모르고 곤두박질치고 있는 동안 우리는 남과 북, 통일을 느낄 수 있는 현장에 목마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디를 둘러봐도 격앙된 목소리들 뿐, 역사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미래에 대한 건강한 희망을 이야기할 곳은 없었다.

 

그렇게 결심하게 된 조중접경지역 답사. 어찌 보면 단순한 출발이었지만 접경지역이 품고 있는 우리 민족의 역사와 미래 앞에서 우리는 숙연해지고 말았다. 지금은 남과 북이 품고 있지 못한 역사의 땅이자 동아시아의 미래를 결정할 위기와 기회의 땅, 조중접경지역 현장에서의 소회를 전하고자 한다.

 

1. 동아시아의 전쟁, 식민의 역사가 새겨진 곳, 대련

2. 조중 친선, 무역의 현장, 단둥

3. 민족이 걸어온 길, 그리고...백두산

4. 남북경협, 동북아의 미래, 도문-훈춘

 

 

압록강 따라 1500km 동아시아의 역사와 현재를 보다 3

민족이 걸어온 길, 그리고..... 백두산 

 

겨레하나 교육문화센터 휴H.U.E 신미연 활동가

 

답사단이 타는 열차는 대련에서 용정까지 달리는 완행열차이다. 지난달 대련시를 출발해 장하, 단동, 통화, 백산, 연길을 거쳐 흑룡강성 목단강시까지 1,380km에 이르는 고속열차가 개통되었다.

  

야간열차가 우리에게 준 선물

 

백두산으로 가는 야간열차를 타는 건 매우 설레는 일이었다. 야간열차라고 해도 우리는 낮부터 서둘러야 했다. 오후 2시부터 달려 다음날 아침 8시에 이도백하에 도착하게 된다. 장장 17시간을 달려 대륙을 건너다니!

 

설레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긴 시간을 어떻게 보내나 싶었다. “아, 17시간을 어떻게 가냐”, “땅이 얼마나 넓으면 17시간을 달리냐”라며 열차에서 버틸 장비들을 챙겼다. 청년은 청년대로, 함께 간 선생님들은 선생님들대로, 학생은 학생대로 각 팀이 마실 만큼의 맥주와 안주거리들. 컵라면을 주섬주섬 담았다.

 

열차는 좁고 활동하기 불편한 덕분에 서로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공간이다.

 

장비들을 가지고 열차에 올라탄 순간 아무도 말이 없었다. 생각보다 너무 좁고 답답한 내부였다. 침대에 몸은 뉘어지는지, 3층 침대에 올라갈 수 있기는 한 건지, 도대체 쉬는 곳은 어디있는건지…….이곳에서 어떻게 17시간을 보낼지 막막했다. 마땅한 공간을 찾지 못해 짐을 들었다 놓기를 반복하고 있는 동안 어느새 열차는 출발하고 있었다.

 

열차는 참 느리게 달렸다. 우리는 열차 속도를 두고 통일호와 비슷하다, 아니다 비둘기호와 비슷하다며 사라진 기차이야기를 하면서 추억을 한껏 살렸다. 느리게 달리는 열차는 여유와 낭만이 있었다. 시간의 틈이 생기니 서울에 두고 온 많은 일들, 그리고 빨리 해결해야 하는 일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느리게 달리는 기차덕분인지 고민들은 천천히 떠오르고 천천히 사라졌다.

 

기차의 독특한 구조 덕분에 자연스럽게 2~3인이 짝이 되어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중국에 와서 고민하게 된 ‘국경’이라는 주제, 그리고 항미원조기념관과 여순감옥에서 받은 정서적 충격들을 편하게 꺼내놓았다.

 

어느 덧 여유가 생긴 열차생활

 

 열차에서 먹는 라면은 별미다.

 

열차가 우리에게 준 첫 번째 선물이 ‘여유’라면 두 번째 선물은 ‘조선족’, ‘동포’와의 만남이었다. 우리가 탄 열차에는 ‘동포’들이 많았다. 한 할아버지는 덥석 손을 잡더니 조선말로 대화하는 답사단이 반가웠는지 ‘조선민족이 장하다’고 말한다. 조선노래를 부르시기도 한다. 약주를 좀 하셨나보다.

 

다른 한사람은 나와 비슷한 나이로 보였다. 집안 어르신들을 모시고 단동에 관광을 갔다가 연길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조선말을 잘하는 사교성이 좋은 사람이었다. 나는 조선말을 쓰는 사람을 보면서 ‘저 사람이 조선족일까, 북한사람일까’하는 호기심이 먼저 들었다. 그는 중국정부당국이 한족중심의 정책을 펴면서 소수민족들은 불안하다고 했다. 최근 조선족이 한국을 비롯하여 다른 나라들로 돈벌이를 하러 가면서 인구가 많이 줄어들면서 위기감을 더 느낀다고 했다. 실제 중국은 한족이 92%로 대다수를 차지하며 소수민족은 8%에 불과하다. 조선족은 소수민족 가운데 13번째 규모이다.

 

현지가이드의 친구들도 만날 수 있었다. 현지가이드는 화교로, 아버지는 중국인 어머니는 조선인이다. 어렸을 때는 북에 살다가 중국에 건너와 대학을 다니고 여행사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그의 친구들 역시 비슷한 처지에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 중국과 북, 어느 한쪽에서도 보호받지 못하고, 항상 차별받아왔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중국 국민인 동시에 조선민족인 조선족, 그들의 삶은 분단과 국경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한 채 혼란스러운 모습이었다.

 

중국 정부는 강력한 ‘동북 진흥책’을 추진하며 동북3성을 관통하는 고속철도 개통을 눈앞에 두고 있다. 고속철은 하얼빈-대련까지 3시간 반 만에 도착할 수 있다고 한다. 중국 동북지역은 한국 교민 3만 명과 1,300여개 한국 기업이 진출해 있으며 중국동포 7만여 명이 생활하고 있다.

 

이제는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빠른 속도로 교류하게 될 동북3성, 열차에서 느끼는 ‘여유’는 사라질 것이다. 대신 더 많은 사람들이 ‘동포’들의 삶에 귀 기울이게 되는 경험을 가질 수 있는 열차이기를 바란다.

 

 

민족의 명산, 백두산 그 거대함과 위대함

 

장백산역에 모두 모였다.

 

최근 공사한 백두산 입구. 중국 정부는 ‘장백산’국제관광지구를 지정하고 백두산행 고속도로를 공사하고 있으며 공항을 만들고 있다.

 

아침 8시 50분, 백두산 아래 첫 마을 이도백하에 도착하였다. 이도백하에서 백두산 정상까지는 우리가 대여한 관광버스를 타고 30분→대형셔틀버스를 타고 20분→봉고차를 타고 10분정도 달리면 만날 수 있다. 수십 대의 봉고차가 대기 중인 것을 보니 이 자체가 거대한 관광사업이라는 것을 새삼 느낀다. 실제로 백두산을 찾는 관광객은 크게 늘었다. 2008년 88만 명이었던 관광객은 2011년에 160만 명에 달했다. 중국은 1992년 백두산을 장백산이라고 명칭을 바꾸고 그 뒤부터 ‘중국 장백산’으로 부르고 있다.

 

백두산의 시작은 자작나무가 알린다. 달리는 차안에서는 찍을 수 없었지만 하얗게 빛나는 자작나무는 단연 돋보였다. 가지런히 잘 정리되어 있는 자작나무숲길을 달리다보면 단풍나무들로 이루어진 산의 모양새가 드러난다. 그렇게 20분 정도 달리다보면 거대한 암벽이 진풍경을 이룬다. 산을 차로 달리는 경험도 색다르지만 하나의 산에서 다양한 모습을 만나는 것은 자연의 위대함을 더욱 크게 느끼게 한다.

 

이곳이 백두산 천지이다. 정말 날이 좋았다. 가이드는 겨레하나가 쌓은 덕이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 백두산에 올랐다.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백두산은 하늘보다 넓게 느껴졌다. 수심 200m라는 백두산 천지는 하늘과 물의 경계를 흐려놓을 정도로 맑고 깊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백두산과 천지가 온전히 우리 것이 아닌 게 안타깝다’ ‘북한으로 왔다면 어떤 감흥이었을까?’ 는 생각들이 반복해서 떠오를 뿐이었다. 이토록 아름다운 백두산과 천지를 두고 영토논쟁이 끊이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백두산은 천지를 분할하여 북한이 54.5%, 중국이 45.5%를 가지고 있다. 1962년 체결한 조중변계조약(朝中邊界條約)이 그 근거이다. 북한이 돈을 받고 백두산을 팔았다는 소문이 있는데 그리 타당해보이지는 않는다. 북한에게 백두산은 혁명의 성지이다. 김일성 주석이 백두산밀영을 중심으로 항일투쟁을 벌인 전통이 있는 곳이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백두산의 제1봉우리 최고봉(2,750m) 장군봉이라고 부른다. 북한은 백두산을 명승지와 자연보호구로 지정해놓고, 백두산 곳곳에 항일투쟁지인 밀영을 복원해놓았다. 북한 청소년은 평양에서 백두산에 이르는 천리길 행군을 한다. 백두산은 자신들의 정통성을 뒷받침하는 ‘성지’인 것이다.

 

오히려 백두산은 오래전부터 영토논쟁이 있어왔다. 1712년 국경을 확실히 하자는 청의 제의에 의해 양국의 대표들이 백두산의 분수령인 높이 2150m지점에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다. 비문에는 <서쪽은 압록강이고 동쪽은 토문강이다.>라고 새겨져있는데 이 ‘토문’이 훗날 문제가 된다. ‘토문’을 어디로 규정하는가에 따라 간도지방의 귀속문제도 달라진다. 청은 토문을 두만강이라고 하며 간도일대를 청나라의 땅이라고 하고, 조선은 토문은 쑹화강 상류로서 간도지방은 조선의 영토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영토논쟁을 더 복잡하게 만들어버린 것이 일본이다. 일본은 을사조약이후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자신들이 직접 청과 간도협약을 맺는다. 간도협약은 1조에서 토문강을 두만강으로 확정하고 청일 양국의 국경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일본은 이 대가로 남만주철도부설권을 얻었다. 19세기부터 한 세기동안 논란을 이어온 백두산과 두만강 상류의 국경은 조중변계조약으로 일단락되기는 했지만, 이 조약이 비공개로 진행된 점, 중국의 동북공정, 간도지역의 영토문제 등으로 하여 한반도 통일과정이나 그 이후에 국경 분쟁의 불씨가 될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문제는 중국이 백두산연구센터를 건립하고, ‘장백산’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준비를 하는 동안 우리는 투자와 공동행동을 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너무나 아름답고 위대한 자연을 눈앞에 두고도 정치적이고 복잡한 생각을 하는 것이 우울했다. 아쉬운 마음에 백두산 천지를 몇 번이고 뒤돌아보고서야 발길을 돌릴 수 있었다.

 

장백폭포, 마치 용이 날아가는 모습과 같다고 해서 ‘비룡폭포’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다시 봉고차를 타고 내려와 장백폭포를 들렀다. 말 그대로 웅장한 폭포였다. 60m이 넘는 길의 폭포로 200m 떨어진 곳에서도 폭포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한다. 중국 북방의 폭포들은 겨울에 모두 얼지만, 오로지 장백폭포만은 일 년 내내 웅장하게 흐른다.

 

백두산과 천지, 그리고 장백폭포를 만난 우리들은 약 2박3일 간의 여정 속에 최절정의 기분에 휩싸이게 되었다. 백두산을 내려와 이도백하에서 5시간을 달려 연길에 도착했다.

 

연길에 있는 류경식당에서 만난 들쭉술과 북한동포들, 중국의 공장이나 식당 등에서 일하기 위해 중국을 찾은 북한 사람은 6만 명이 넘는다.

   

연길은 1909년 간도협약으로 개방되자 많은 조선인들이 이주하면서 개척해온 지역이다. 이곳에는 조선어 라디오 방송국과 신문사가 있으며, 조선인이 세운 연변대학교와 연변과학기술대학교가 있다. 연길은 중국속의 ‘조선’이라는 명칭이 무색하지 않은 곳이다.

 

익숙한 분위기에 취한 우리들은 북에 가볼 수 없는 아쉬움을 대신해 북한식당에서 저녁을 먹기로 하였다. 북측에서 파견 나온 종업원들이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공연도 하고 서빙도 하는 식당의 손님은 대부분 중국인이었다. 소란스러운 분위기에, 중국손님들의 입맛에 맞추느라 조금은 어색한 우리민족의 음식. 공연도 조선노래보다는 중국노래가 더 많았다. 공연 중인 종업원들과 사진 찍겠다며 달려 나오는 술 취한 중국손님도 좋게 보이지는 않았다.

 

중국 땅에서 만나는 북측의 모습이니 어찌 생각하면 당연한 것인데, 북측 본래의 모습과 만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 남한사람의 입장에서는 마음이 무거웠다. 우리 땅에서 만난 남북이 아니라 각각 다른 목적으로 중국에 온 남과 북, 왠지 모를 어색함이 크게 다가왔다.

 

   

북한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연길시내를 관통하는 강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높은 빌딩과 조경으로 화려한 연길은 조선족자치주 60주년을 새로운 발전을 기회로 삼고 싶어 하는 듯 했다. 앞으로 중국의 동북3성 진흥정책, 북중접경지역의 경제협력, 남한과의 문화교류로 더 혼잡하거나 더 다양한 모습을 갖게 될 연길이 아닐까.

 

우연히 발견한 포장마차에서, 민족의 명산 백두산에 올라 한껏 부푼 여행자의 마음, 연길에서 만난 북한 동포와의 어색한 만남으로 무거워진 분단민족의 마음을 중국의 맥주한잔과 내려놓으며 밤을 지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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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조중접경지역. 고백하건데 겨레하나에게 접경지역은 지극한 관심의 대상이 되지는 못했다. 평양, 개성, 신의주, 백두산, 금강산... 인도적 지원을 매개로 통일운동을 해온 우리단체가 시민들에게 소개할 곳은 많았고, 2004년 아리랑 관광이후 한 해 한 번씩 서울에서 출발해 평양으로 가는 직항기를 띄우는 일이 연례행사였기 때문이다. 중국으로 백두산에 오르다니, 우리 땅으로 오를 수 있는 길이 있는데!

 

남북관계가 바닥을 모르고 곤두박질치고 있는 동안 우리는 남과 북, 통일을 느낄 수 있는 현장에 목마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디를 둘러봐도 격앙된 목소리들 뿐, 역사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미래에 대한 건강한 희망을 이야기할 곳은 없었다.

 

그렇게 결심하게 된 조중접경지역 답사. 어찌 보면 단순한 출발이었지만 접경지역이 품고 있는 우리 민족의 역사와 미래 앞에서 우리는 숙연해지고 말았다. 지금은 남과 북이 품고 있지 못한 역사의 땅이자 동아시아의 미래를 결정할 위기와 기회의 땅, 조중접경지역 현장에서의 소회를 전하고자 한다.

 

1. 동아시아의 전쟁, 식민의 역사가 새겨진 곳, 대련

2. 조중 친선, 무역의 현장, 단둥

3. 민족이 걸어온 길, 그리고...백두산

4. 남북경협, 동북아의 미래, 도문-훈춘

 

 

압록강 따라 1500km 동아시아의 역사와 현재를 보다 2

남·북한, 중국이 버무려진 도시 단둥 

 

겨레하나 교육문화센터 휴H.U.E 이연희 활동가

 

대련에서의 첫날 일정을 마치고 4시간 30분여를 달려 도착한 단둥. 화려한 불빛과 가는 곳마다 눈의 띄는 건설현장들이 단둥의 활기를 웅변하는 듯 했다. 일행이 도착하기 전날인 9월 18일은 마침 일제가 만주철도 폭파사건을 빌미로 만주를 침략한 9.18사변(만주사변) 81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최근 남중국해 조어도(다오위다오) 문제를 둘러싸고 높아진 반일감정 탓에 온 시내가 들썩일 만큼 대규모 반일시위가 진행되었다고 현지가이드는 전한다. 전날 시위의 여파인 듯 지나는 차량 곳곳에 반일구호가 담긴 스티커, 현수막이 부착된 모습도 뜨문뜨문 볼 수 있었다. 우리네 사는 모습과 다르지 않은 이곳도 아픈 역사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알 수 없는 연민이 밀려든다. 중국인들의 반일시위 현장을 목격하지 못한 아쉬움과 함께.

 

한국전쟁의 기록, 압록강단교

 

둘째날 아침, 서둘러 도착한 압록강단교. 이름난 관광코스로 개발된 탓인지 이른 아침부터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북한과 중국을 오가는 교역물자의 80%가 지난다는 조중우의교와 압록강단교가 나란히 서 있는 곳이니 오가는 발길도 잣을 터. 단교주변에는 관광객을 위한 호텔과 상가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압록강단교

   

북한의 평안북도 신의주와 중국 단둥을 잇는 다리인 압록강 철교는 한반도와 중국 둥베이(東北) 지방을 연결하는 관문이다. 1911년과 1943년 일제에 의해 두개가 가설되었는데 하류 쪽에 먼저 가설된 다리는 6·25전쟁 때 미군의 폭격에 파괴되어 절반만 남아 있고(압록강 단교), 상류 쪽의 다리는 1990년 조중우의교(朝中友誼橋)라 개칭되어 오늘날까지 한반도와 중국을 잇고 있다.

 

북한쪽으로 교각 한 개만을 남겨두고 끊긴 다리는 참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일제에 의해 건설되어 일본의 대륙침략 첨병역할을 했고 한국전쟁이 나자 중국 인민지원군은 북한을 지원(1950년 10월)하기 위해 이 다리를 건넜으며, 결국 이를 저지하려는 미군의 폭격(1950년 11월)으로 오늘날의 모습에 이르게 된다.

 

한국전쟁에서 사망한 아들 마오안잉(毛岸英)의 시신을 조선(북한)에 묻은 마오쩌둥에게 한국전쟁 참전은 그만큼 특별한 의미였을 것이다. 단교입구에 자리 잡은 팽더화이(彭德懷)와 인민지원군 지휘관들의 조각상은 중국이 왜 끊어진 다리를 지금까지 고스란히 보존해 왔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단교입구에 자리 잡고 있는 팽더화이와 인민지원군 지휘관들의 조각상

 

그렇다면 우리에게 단교는? 중국인들과 마찬가지로 일제 식민과 한국전쟁의 기억임과 동시에 손에 잡힐 듯 가까운 북녘 땅을 지금은 가볼 수 없는 안타까움 같은 것이었다. 단교이편의 흥성거림을 돋보이게라도 하듯 고요하기만한 강 건너편의 북녘 땅. 이국에서 처음만난 느끼는 민족은 그렇게 아픔으로 먼저 다가왔다.

 

압록강변 저쪽 북녘 땅에는 제방시설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큰 비라도 올라치면 강이 범람하기 일쑤라고 한다. 더구나 중국쪽 강변에는 제방시설이 다 되어 있어 범람은 어김없이 신의주 쪽으로 일어나기 마련인데, 지난해 장마로 신의주에 큰 물난리가 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특히 이쪽에서 수위조절을 위해 댐 문을 열었기 때문에 홍수피해는 더 컸다고. 해마다 물난리를 겪어야 하는 북녘 동포들을 위해 우리가 도울 일이 없을까 생각해 본다.

 

항미원조기념관 ‘미국에 대항해 싸우는 조선을 돕다’

 

단교에서의 사색을 더 이어가기 위해 우리는 항미원조기념관을 찾기로 했다. 관광객들이 의례 둘러보는 코스가 아닌지라 현지가이드도 초행길인 듯 했다. 기념관에 들어서자 1953년 한국전쟁이 종료되었음을 알리는 높이 53m의 육중한 기념탑이 우리를 맞았다. 기념탑에는 ‘抗美援朝紀念塔(항미원조기념탑)’이라는 덩샤오핑(鄧小平)의 친필 휘호가 새겨져 있었다.

 

전시관내에는 한국전쟁 참전과정과 전사들에 관한 기록, 중국인민지원군의 활약상 등이 상세히 전시되어 있다. 한국전쟁에 관한 꽤 많은 자료들을 소장되어 있는 듯 했다.

 

안타까운 사실은 기념관 해설사의 친절한 해설이 있었지만 중국어로만 진행되는 탓에 알아들을 수 없었고, 현지가이드도 초행길인지라 원하는 만큼의 설명을 듣기도 어려웠다는 것이다. 아쉽지만 그저 눈짐작으로만 그 의미를 읽어 내리는 수밖에.  

 

한국전쟁에 관한 많은 자료들이 소장된 항미원조기념관

 

모택동과 팽덕회. ‘항미원조보가위국’이라고 쓴 모택동의 친필 

 

북에서 인민지원군에 보낸 감사휘장들

 

‘미국에 대항하여 싸우는 조선을 돕는’ 전쟁. 짐작만으로도 한국전쟁에 대한 중국의 기록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들의 역사 앞에서 누구는 궁금함에 귀를 쫑긋 세웠고, 누구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중국에게 한국전쟁 참전은 항일전쟁과 사회주의혁명을 도운 ‘조선’이라는 혈맹에 대한 예를 다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1840년 아편전쟁에서 시작해 1945년 태평양전쟁이 끝나기까지 미국을 포함한 서양열강과 일본에 의한 100년간의 식민지배 역사를 되풀이 할 수 없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인 듯 했다. 참전을 망설이던 중국이 연합군의 원산 진출에 위협을 느끼고 참전을 결심한 것은 이를 뒷받침한다.

 

서로 적이 되어 3년을 피흘리며 싸운 전쟁이기에 그 역사의 앙금을 모두 털어내고 치유하는 일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더구나 한국전쟁은 아직 진행형이 아닌가. 한국전쟁이 진정한 종료를 알리는 날, 한국전쟁에 대한 모든 기록을 털어놓고 진정 우리 민족의 입장에서 재조명해 볼 날이 오기를 바래본다.

 

동북공정으로 사라진 고구려의 성, 박작성

 

아쉽지만 강렬했던 항미원조기념관을 뒤로 하고 일행은 단둥에서의 마지막 코스인 박작성(泊灼城)으로 발길을 돌렸다.

 

박작성은 고구려의 성 중의 하나로, 단둥 시에서 4km 떨어진 호산(虎山)에 위치하고 있다. 하지만 옛 고구려의 박작성은 이제 사라지고 없다. 중국의 동북공정 과정에서 박작성은 고구려의 옛 성이 아니라 만리장성의 동단기점으로 탈바꿈 된지 오래(1990년)이며, 그 이름도 호산장성으로 명명되었다. 동행한 해설사에 따르면 ‘성곽의 방향이나 축성법이 누구로부터 누구를 지키겠다는 것인지 조차 설명이 안 되는 엉터리로 옛 성을 복원한 것이 아니라 쌩짜로 지어낸 것’이라고 한다. 언뜻 봐도 급조된 것이 분명한 짝퉁 성곽을 오르면서 내내 씁쓸하고 불편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동북공정으로 사라진 고구려 박작성 터에 지어진 호산장성

 

호산장성 꼭대기에서 내려다 보이는 압록강과 북녘땅

 

통일적 다민족국가론과 동북공정. 만일 그것이 자신들의 과거와 미래에 힘을 불어넣기 위한 것이라면 3자인 우리가 토를 달 이유는 없다. 하지만 그 발상부터 다른 민족의 역사를 왜곡하고 침해하는 것이라면 문제는 달라진다. 그런데 고구려라는 한 뿌리는 가진, 지금은 분단된 우리는 제대로 항의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라니.

 

중국과 북한의 국경 중 최단거리, 일보과

 

박작성 꼭대기에서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압록강과 북녘 땅을 위안삼으며 오른 길을 되돌아 내려왔다. 이어 일행의 발길이 닿은 곳은 일보과(一步跨). 중국과 북한의 국경 중 최단거리라는 일보과는 정말 한걸음이면 닿을 만큼 지척에 북녘 땅을 마주보고 있었다. 철책도 경계도 없는 이민족과의 국경에서 우리의 휴전선을 생각하니 다시 가슴이 먹먹해졌다.

 

의외로 중국과 북한의 국경 어디에도 우리가 상상했던 살벌한 기운은 찾기 힘들었다. 뉴스에서 접하는 북중국경은 날마다 이어지는 탈북과 강제송환으로 아비규환이 펼쳐지는 곳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최근 기획탈북으로 오히려 경계가 강화되고 있다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단둥에서의 둘째 날 일정은 이렇게 마무리되고 있었다. 한껏 욕심을 부려서일까. 아쉬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계획했던 일정 중에 아리스포츠 방문이 무산된 것은 그 중 가장 아쉬운 일.

 

아리스포츠는 인천시가 5억원을 투자하고 남북이 협력해 만든 기업이다. 원래 평양공장 설립을 추진했으나 5.24조치로 좌절되었다가 단둥에 공장을 짓게 되었다고 한다. 아리스포츠 방문을 추진했던 이유는 비록 이국에서지만 어렵게 이어가고 있는 남북협력의 현장을 목격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북관계의 현실은 그조차 쉬이 허락지 않았다.

 

남북한과 중국이 버무려진 도시 단둥. 이곳에선 중국인, 한국인, 조선인(북한사람), 조선족, 조선출신 화교 등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자연스레 어우러져 살아간다. 이념은 달라도 내세우는 이 없다. 전쟁과 이민의 풍파를 딛고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의 도시. 북중무역의 최전방기지로 날로 발전하고 있는 단둥이 그들에게도 우리 민족에게도 기회의 땅이 되기를 바래본다.  

 

대륙에서의 특별한 경험, 17시간을 달려 연길로 가는 야간열차

 

단둥에서의 일정을 마친 우리 일행은 셋째날 답사를 위해 연길행 야간열차에 올랐다. 이번 답사에서 가장 기대되는 코스 중에 하나인 야간열차는 장장 17시간을 달려 일행을 이도백하에 내려주게 된다. 미지근하고 달큰한 중국맥주에 벌써 익숙해진 우리는 설레는 마음으로 연길행 야간열차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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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접경지역. 고백하건데 겨레하나에게 접경지역은 지극한 관심의 대상이 되지는 못했다. 평양, 개성, 신의주, 백두산, 금강산... 인도적 지원을 매개로 통일운동을 해온 우리단체가 시민들에게 소개할 곳은 많았고, 2004년 아리랑 관광이후 한 해 한 번씩 서울에서 출발해 평양으로 가는 직항기를 띄우는 일이 연례행사였기 때문이다. 중국으로 백두산에 오르다니, 우리 땅으로 오를 수 있는 길이 있는데!

 

남북관계가 바닥을 모르고 곤두박질치고 있는 동안 우리는 남과 북, 통일을 느낄 수 있는 현장에 목마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디를 둘러봐도 격앙된 목소리들 뿐, 역사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미래에 대한 건강한 희망을 이야기할 곳은 없었다.

 

그렇게 결심하게 된 조중접경지역 답사. 어찌 보면 단순한 출발이었지만 접경지역이 품고 있는 우리 민족의 역사와 미래 앞에서 우리는 숙연해지고 말았다. 지금은 남과 북이 품고 있지 못한 역사의 땅이자 동아시아의 미래를 결정할 위기와 기회의 땅, 조중접경지역 현장에서의 소회를 전하고자 한다.

 

1. 동아시아의 전쟁, 식민의 역사가 새겨진 곳, 대련

2. 조중 친선, 무역의 현장, 단둥

3. 민족이 걸어온 길, 그리고...백두산

4. 남북경협, 동북아의 미래, 도문-훈춘

 

 

압록강 따라 1500km 동아시아의 역사와 현재를 보다 1

동아시아의 전쟁, 그리고 식민의 역사가 새겨진 곳, 대련

 

 

겨레하나 교육문화센터 휴H.U.E 신미연 활동가

 

회원들과 함께 북에 가본지는 4년이 넘었지, 남북관계는 긴장과 갈등의 연속으로 바닥을 치고 있지, 우리는 ‘감동적이고 미래지향적인’ 평화통일을 말하는 단체임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희망이나 감격을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너무 안타까웠다. 그동안 겨레하나가 촉촉이 뿌려둔 평화통일감수성마저 메말라버리는 건 아닐까 걱정도 되었다. 형편이 어렵기는 해도 무슨 수를 내야했다.

 

‘남북관계는 멈춰있지만 그렇다고 북이 멈춰있는 것은 아니니까’ 하는 생각으로 북-중경협의 현장을 답사하기로 결정했다. 북과 교류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달래고자, 한편으로는 우리의 미래는 여전히 남북협력과 통일이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말이다.

 

조중접경지역을 가다.

 

인천에서 대련은 비행기로 한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중국은 대한민국과 매우 가까운 곳에 있었다. 한편 중국은 정말 넓고 넓었다. 우리는 여행기간 내내 ‘대륙’이라는 단어를 달고 살았다. 대련공항에서 만난 현지가이드가 처음 건넨 말도 “백두산 여행은 일명 ‘엉덩이 여행’이니 장거리 이동시간을 담담하게 받아들이자”는 것이었다. 중국 사람들은 앞집에 잠깐 간다고 말하면 2시간이라면서 여행기간 내내 우리를 달래곤 했다. 덕분에 이동시간에 대해서만큼은 마음을 단단히 먹게 되었다.

 

실제로 4박 5일 동안 압록강과 두만강을 따라 1500km, 총 35시간을 이동하였다. 짧은 기간동안 바쁜 일정, 많이 본다고 많은 것을 느끼는 것은 아니지만 가난한 시민단체에게 주어진 큰 기회였기에 최대한 많은 것을 배우고자 욕심을 부렸다.

 

4박 5일 동안 답사여행을 하게 될 요녕성(라오닝성), 길림성(지린성), 흑룡강성(헤이룽장성)은 한반도 면적의 3배가 넘는다. 요령성은 대한민국보다 크다.

 

동북 3성의 총면적은 79만㎢(중국 전체의 8.2%)이다. 한반도는 22만㎢(남한 10만㎢)이다.

 

처음 도착한 대련은 요녕성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로, 북방의 홍콩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관광 도시이다. 동시에 1년 내내 해면이 얼지 않는 항구 덕에 동북지방의 경제중심지로 세계에서 살기 좋은 100대 도시 중 하나이기도 하다.

 

한편 이 지역은 중국 현대사에 있어 수난의 현장이다. 대련은 청일전쟁 이후 (1894년~1885년) 러시아의 관리하에 있었다. 대륙진출의 꿈을 키우고 있던 일본은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키고 러시아가 주둔하고 있던 여순항을 기습공격한다. 러시아로부터 대련과 여순을 빼앗은 일본은 남만주철도까지 접수하고 관동군을 주둔시킨다. 대련-여순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서야 중국으로 반환되었다.

 

대련 시내에는 그 당시 건물이나 유적이 그대로 남아있어 러시아와 일본이 연달아 지배하던 흔적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짧은 일정으로 인해 아쉽게도 대련시내는 둘러보지 못하고 바로 203고지로 향했다. 

 

러일전쟁의 최대격전지 203고지

 

답사단은 러일전쟁의 최대격전지 203고지에 도착하고서도 왜 이곳을 굳이 왔는지, 왜 여기가 시작점인지 잘 알지 못하는 어수룩함을 보였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동아시아의 현대사를 압축하여 보여주고 있는 곳이었다.

 

조선의 지배를 둘러싸고 벌어진 청일전쟁, 조선과 만주의 지배를 확정짓기 위해 벌인 또 한번의 싸움 러일전쟁으로 이어졌다. 203고지의 전투는 러일전쟁의 승패를 갈랐다. 그리고 조선과 만주의 운명도 결정지었다. 일제는 제국주의로서의 침략야욕과 잔인함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과정은 중국 땅에서 벌어졌다.

 

일본은 승리를 기념하고 여순전투에서 희생한 장병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령산(얼령)탑을 세웠다. 전투에서 승리자인 일본은 1만 6천여 명의 사상자를, 러시아는 6천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참 이상한 전투이다. 승리자가 더 많은 피해자를 내다니.

 

전투에 사용된 포탄 탄피를 녹여 만든 탄환 모양의 기념탑, 이령산(얼령)탑이다.

 

여순일대에서 가장 높다는 해발 203고지에 서니 여순항 전체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중요한 전략지’라는 이곳에서 벌어진 역사를 상기하자니 중국에게는 얼마나 감추고 싶은 수치스러운 역사일까 생각해본다.

 

이령산탑 근처에 '명기역사 물망국치(銘記歷史 勿忘國恥)‘ 라고 새겨진 비석이 있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역사를 마음에 새겨 나라의 치욕을 잊지 말라”는 뜻이다.

 

역사는 나라와 민족이 나아가는 또 다른 힘이다. 일본이 조선식민지배의 교두보가 된 러일전쟁을 정작 우리는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까. 종종 ‘대한민국은 고도의 성장을 이루었다, 과거가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된다, 역사에만 연연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만날 때마다 답답함을 느낀다.

 

우리는 그 날의 치욕을 잊지 않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새기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여순감옥에서 만난 민족독립투사

 

여순감옥 정면. 한국인을 비롯한 외국인에게는 2009년 10월에 개방하였다.

 

여순감옥은 안중근의사와 신채호 선생이 수감되었다가 생을 마감한 곳으로 한국인에게도 유명하다. 다른 나라 땅에서 조선의 독립투사를 만난다는 것은 왠지 긴장이 되었다.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들여놓는데 우리를 제일 먼저 맞이한 것은 거대한 벽돌건물이었다.

 

회색벽돌은 러시아, 붉은 벽돌은 일본이 지은 것이다.

 

건물 한 벽면전체가 1층은 회색벽돌로, 2층 이상은 붉은색벽돌로 지어져있었다. 1902년 러시아가 짓던 건물을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증축한 흔적이다.

 

여순감옥은 동북지역에서 최대 규모이다. 250여개가 넘는 감방, 한 번에 2,000여명까지 수용할 수 있다고 하는데 연간 수감자는 2만 여명이 넘었다고 한다. 죄수는 대부분 정치범 사상범으로 분류되는 항일독립투사들로 중국인, 조선인, 러시아인이 많이 투옥되었다.

 

요목조목 전시되어 있는 물품들에 감탄하면서 수색실, 수감실, 고문실을 둘러보았다. 개인적으로는 사형장이 가장 충격이었다. 우선 사형시킨 시신을 손도대지 않고 나무통에 넣어 나무통채로 쌓아놓는 일제의 잔악함에 충격을 받고, 그것을 그대로 전시해 놓은 중국의 적나라함에 또 한번 충격을 받았다.

 

일본이 패망하기 전 3년 동안 약 700여명의 항일투사가 사형을 당했다는데 안중근의사와 신채호선생도 이와 같은 모습으로 숨을 거뒀을 생각을 하니 섬뜩하고 서러웠다.

 

여순감옥 국제항일 열사 기념관,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을 기념하여 건립하였다.

 

안중근 의사 입상

 

여순감옥 내에는 국제항일 열사기념관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많은 조선독립투사들을 만날 수 있었지만 그중 안중근의사의 활동과 기록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당시 주은래 총리(1898~1976)는 안중근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사건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중조인민의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을 반대하는 투쟁은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_ 주은래

 

주은래 총리는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사건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최근 안중근의거 100주년을 맞아 안중근의사를 기념하는 행사들이 국내에서도 많이 있었지만 중국에 와서 독립 운동가들의 기록을 만나니 부끄러움과 경외심이 동시에 생겼다. 그의 나이 31살에 중국 땅에서 옥중에서 동양평화론을 쓰다 생을 마감하였다는 사실은 꽤 오래동안 잊지 못할 것 같다.

 

"내가 한국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3년 동안 해외에서 풍찬노숙 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2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을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여한이 없겠노라" - 안중근 의사의 뤼순감옥에서 남긴 유언

 

여순감옥으로 현장교육 온 중국 군관학교 학생들

 

여순감옥은 한눈에 보기에도 ‘관광지’로 보일만큼 잘 마련되어 있었다. 동북지역 최대 규모의 감옥이라더니 꼼꼼히 돌아보자니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규모뿐만이 아니었다. 여순감옥만 돌아봐도 일제의 식민지 중국으로서의 수난의 역사를 잘 알 수 있도록 기획되어 있었다.

 

얼마 전 다녀온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 떠올랐다. 전시관도 기념관도 아닌 애매한 모습을 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보면서 잘 활용하고 있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반면 중국정부는 여순감옥을 71년에 복원하여 전시관으로 개방을 했으며 88년부터 국가중점역사문화재로 지정하고 있었다.

 

‘중국정부는 이곳을 매우 의미있게 생각하는구나’ 라고 혼잣말을 할 때 중국군관학교 학생들이 단체로 방문하고 있었다. 낯선 장면이었지만 왠지 부러웠다.

 

중국은 자신들의 역사를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하고, 그를 기억하려는 후대를 위해 러일전쟁의 203고지나 여순감옥과 같은 자산을 가지고 있었다.

 

여순에서 단동까지는 약 5시간, 깜깜한 밤에 숙소에서 열린 세미나

 

멀고 먼 길

 

현재보다 강력한 기록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첫날의 답사는 남은 3박4일의 여정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바꾸어 놓았다. 여행의 설렘은 어느새 답사여행다운 진지함과 숙연함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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