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거리를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취재할 수가 없어 불만이 많던 사진기사를 만난 일이 있다.

 

그는 이번 방북에 연인들이 자연스럽게 데이트 하는 장면을 찍고 싶다는 자신의 제안을

북이 받아줘서 “이게 웬 떡이냐?!” 기뻐하며 을밀대 공원에 갔는데

막상 가보니 ‘가공하지 않은 자연스러움’을 찍겠다는 꿈은 또 좌절되었다고 한다.

나무 의자에 다정히 앉아있는 노부부, 손을 꼭 잡고 걷는 청춘남녀 등 몇 쌍의 연인들이 있긴 했지만

동원된 티가 역력했단다.

좋은 옷을 차려입고 기자를 흘끔흘끔 바라보면서 데이트 하는 장면을 '연출'하는 바람에

기자는 실망하였고 ‘동원’과 ‘연출’을 각색한 북에 화가 나 있었다.

 

그림. 서영준 화백

 

 

사실 나도 평양시민의 삶의 표정을 카메라에 담고 싶을 때가 많았다.

을밀대 공원에서 주패놀이에 신명나게 푹 빠진 평양시민의 생생한 표정을 찍고 싶었던 적도 있으나,

북 안내원들의 시선을 의식하여 카메라 셔터를 누르지 못했다.

북한 사람 개개인의 자연스럽고 행복한 모습을 찍어 가면

남쪽에서 북한이 강제적이고 획일화된 사회라는 이미지를 극복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북한 분들에게 남측의 그런 시각을 이야기해주기도 민망하고

남한 언론에 북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사진이 공개될 것을 예민하게 경계하는

북의 고민이 이해되지 않는 바도 아니어서 그만두곤 했다.[각주:1]

 

북한이 획일화된 이미지 촬영만을 허용한다는 주장은 사실일까?

또 그 이유가 자연스러움을 외면하고 ‘북한 당국의 정책 홍보’만을 강요하는 분위기 탓일까?

 

사진이 ‘인간과 자연에 대한 생생한 장면’을 찾아내 표현해야 한다고 보는 점에서 남북이 다를 리 없다.

그러나 여기서 생각해보아야할 논점이 있다.

그것은 남과 북이 사진이나 문화예술 분야에서 추구하는 내용과 방식의 차이는

<자유스러운 개성과 순수함>이냐 <정책홍보성>이냐의 차이가 아니라,

무엇이 생생하고 자연스러운 것인가에 대한 관점의 차이로부터 발생한다고 봐야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어느 것이 우리 식의 잣대로만 북을 평가하는 것이 아닌

북한 사람들의 감성과 진정성으로부터 사물을 보는 내재적 접근일까?

 

북한은 사회현실 속에서 부대끼고 살아가는 구체적인 표현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남쪽의 개인의 개별적 감수성의 영역, 개인과 개인의 갈등을 주로 다루는 영역,

사회현상과 무관한 개성적인 표현과 주장을 선호하지 않는다.

 

특히 북한을 고립 압살하려는 서방의 정치적 경제적 봉쇄를 뚫고

<나라의 안보>를 지키며 <강성대국- 경제강국>을 건설해야 하는 기세와 맞물려 더욱 그런 분위기가 강한 것 같다.

 

그러다보니 사진 한 장, 그림 한 점에도

사회를 개조 건설 하기위해 고군분투하는 인간의 삶과 열정을 표현하는 것에 주력하며,

풍경화에 조차 <우리 민족, 우리 강산 제일주의>의 기치가 반영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분위기인데 남쪽에서 분단을 넘어 오신 분들이 기껏 데이트 하는 장면 혹은 주패놀이 하는 장면이나 찍겠다니,

너무 철이 없지 않느냐고 보는 것이 아마 북의 시각일 것이다.

 

또 한 가지 우리가 고려해야 할 점이 있다.

북한은 남쪽 사람들이 다듬어지지 않은 평양의 모습을 무작위로 찍는 것에 늘 민감하다.

자칫 헝크러진 북녘 사진 한 장이 남쪽 언론에 공개되어

틈만 있으면 반북기사를 써대는 보수언론에 자료사진으로 이용될까봐 민감하게 경계한다.

남쪽 사람들이 헝크러진 사진을 찍으려는 것이 아니라고 항변하지만

신나게 주패놀이를 하는 시민의 표정조차, ‘대낮에 공원에서 도박’하는 사진으로

보수 언론에 보도될 것을 경계하는 북을 안심시킬 방도는 사실 없다.

 

이런 이야기를 할 때면 웃지 못할 한 사건이 생각난다.

‘아리랑 공연 참가단’으로 연일 수천명의 남쪽 관광객이 평양에 올 무렵,

대학생 참가단이 평양에 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 한 학생이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대뜸 순안공항 위생실(화장실)부터 찍다가

청소하시는 아주머니에게 들켜서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문제를 일으킨 학생은 학생회 대표로서 북에 온 학생 사진 기자였는지 몰라도

북에 와서 자기 딴에는 자연스러운 삶의 현장 여러 곳을 찍어 학우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하긴 화장실이야 말로 아무도 돌아보지 않으면서도 가장 일상적인 생활의 소재니까!

그러나 북한의 관계기관에서는 무척 흥분하여

“학생회 간부라면서 왜 좋은 곳을 다 놔두고

하필 어둡고 후미진 위생실을 찍는 이유를 도무지 납득할 수 없다”며 조사를 벌렸다.

조사하는 몇 십 분 동안 그 비행기로 같이 왔던 수 백 명의 발이 영문도 모른 채 공황에 대기해야 했다.

 

그 때 하루 1000명도 넘는 남측 관광객을 북에서 초청한 이유는

아리랑 공연을 비롯하여 평양의 가장 아름답고 자랑찬 모습을 보여주려던 의도였던 만큼,

학생회 대표로 왔다던 학생이 대뜸 위생실 촬영부터 하는 일이 어이없을 법하다.

참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 학생도 이해가 되고 새파랗게 질렸던 북쪽도 이해가 갔다.

이렇듯 남북의 인식 차이가 사진촬영을 둘러싸고도 늘 아주 예민하게 엇갈린다.

 

북을 드나드는 남측 사람들은 자신의 카메라를 순안공항이나 개성, 금강산 CIQ에서 일일이 검사하는 것을

심각한 프라이버시 침해로 여기고 화를 내는 분들이 많다.

그럼에도 이러한 북의 시각과 고충을 이해한다면 다소라도 마음이 좀 편해지지 않을까 생각된다.

남북의 대치상황을 고려하면 자신이 당한 인권침해 의식으로부터 한발 물러설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지 않을까?

 

다시 위의 사진기자의 예로 돌아가 보자.

남북의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인식에 대한 차이, 문화예술에 대한 관점의 차이,

또 남이 잘 모르는 북의 내부 정서 대한 차이를 간과하고,

그저 자연스러운 데이트 장면을 찍겠다는 그 기자의 요구가 북으로서는 얼마나 난감했을까?

 

북 안내원은 기자의 바람이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내 경험으로 남쪽 사람들이 들이미는 카메라 앞에서 자연스러운 포즈를 취할 수 있는 평양 사람은

장난기가 철철 넘치는 개구쟁이 남자 아이들 뿐이었다.

본인의 얼굴이 찍힌 사진이 어떻게 사용될지도 모르면서

그저 일상적인 표정을 지어보일 수 있는 평양 시민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북의 안내원은 북녘 동포들의 생생한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잡지에 내고 싶어 하는 그 기자의 마음을 애틋해 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이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데이트 족을 <동원>하고 <연출>하는 눈물겨운 배려를 해준게 아닐까?

 

그림. 서영준 화백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그날 동원된 데이트 족은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왜 자신들이 남쪽의 기자를 위해서 그렇게 포즈를 취해야 하는지,

그게 어째 통일에 유리한 것인지 모르겠다며 항의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을 설득하느라 북측 안내원들은 애를 먹었을 지도...

 

기자의 행동은 어쩌면

남한 사람들에게 ‘있는 그대로의 북’이 아닌 ‘남쪽이 보고 싶어하는 북한의 형상’만 보게 하는 것 아닐까?

그것이 <민족의 동질성>을 확인하는 최선의 방법일까?

남북이 더 화해하고 협력하기를 바란다면

지금의 남북의 차이를 좀 더 객관적으로 제시하고 다양한 분석의 틀을 소개하되,

그에 대한 판단을 남쪽 사람들의 입장에 맞는 다양한 해석에 맡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남북의 동질성을 확인하는 작업을 <북한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만으로 이루던 시기는 지났다.

그리고 그것이 글재주가 미천함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좌충우돌 북한경험담을 쓰는 진정한 이유이기도 하다.

 

 

 


  1. 북이 남쪽 사람들의 개인 카메라를 그렇게 통제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그것이 남쪽 언론에 보도되어, 반북한용 홍보자료로 활용되는 것에 대한 우려이며, 이는 실제로 현실성이 매우 높다, 그러므로 북은 남쪽 방문단에 대하여 언론에 보도되어도 절대로 악용되지 않을 사진촬영만을 허용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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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종합대학 생명공학부에 항생제 소공장 건립을 지원할 때의 이야기이다.

 

남쪽에서 함께 간 기술자들이 공장설비 설치에 몰두해 있는 동안

나는 생명과학부 학장님과 사무실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학장님은 인정많고 따뜻한 이웃집 어르신 같은 인상을 주시는 분이었다.

그 분은 남쪽 통일운동가의 삶에 대하여 많이 궁금해 하셨다.

통일운동을 하면 감옥에 간다는데 6.15공동선언 이후에도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통일운동단체 일을 하면 생활은 어떻게 해결하는지, 두런두런 물으시면서 우리들의 삶에 대해 딱해 하셨다.

자기 삶을 챙기랴 통일운동하랴 얼마나 힘드냐며,

사무실에 있던 접대용 빵 한쪽이라도 더 먹어보라고 집어 주실 때는

정말 훈훈한 시골 할아버지 같아 감동이 밀려오기도 했다.

 

잠깐, 그 정도의 일에 감동해하느냐는 분들을 위해 잠시 설명을 해두어야겠다.

남쪽에서는 통일운동을 한다고 하면, 좀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는다.

남북관계가 열린 이후로 나아지긴 했지만,

시민단체 중에서도 별반 인기 없는 곳이 평화통일 분야이고,

인도지원단체 실무자들은 ‘퍼주기논쟁’으로 머리 뒷꼭지가 따갑기 마련이다.

그래서 북쪽에서 우리들을 통일애국운동을 하는 분들이라고 환대해 줄때마다,

북쪽이 마치 친정집처럼 느껴지며 대북 지원 기금을 마련하느라 쌓인 피로가 일시에 확 풀리곤 한다.

북쪽 분들이 이렇게 따뜻하며 정이 많다는 것을 느낄 때 마다,

‘민족의 동질성’ 같은 케케묵은 단어(?)들이 심장을 뛰게하는 신성한 열정으로 다시 살아나,

남북의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자유롭게 만나 흉허물없이 묵은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날을 기다리게 한다.

 

교수님께서 우리 아이가 몇 살인지를 물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지금 고등학생이고, 대학에 가면 학비 걱정이 태산인데,

등록금만 한해 1000만원이 넘는다’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위로를 기대하고 약간의 어리광을 섞어서 말이다.

 

그때 나는 교수님께서 부모노릇 하랴 통일운동하랴 정말 애쓴다며,

손이라도 잡아주실 줄 예상했던 것 같다.

이 어른이 얼마나 나를 딱해 하실까?

그런데 반응이 너무 뜻밖이다.

 

그림. 서영준 화백

 

애잔한 눈빛이 아닌 갑자기 장난기라도 발동한 듯, ‘웬 쾌재냐는 듯’ 생기어린 눈빛...

교수님께서는 갑자기 학생들을 몇 명이라도 불러와야겠다며, 금방이라도 자리를 일어나실 분위기다.

 

“요즘 우리학교 대학생들이 너무 철이 없어요.

자기들 학비를 국가에서 전액 부담하는 것이 고마운 줄 도통 모르거든!

등록금만 무료인 것이 아니야!

기숙사에서 무료로 재워주고, 교복도 나오고, 용돈까지 주거든?

근데 우리 학생들은 그게 얼마나 큰 혜택인지 모르고 당연시 여긴단 말야.

이 아이들한테 이경 총장 선생이

남조선 대학생들에 비해 자기들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설명을 좀 해주오,

국가의 고마움을 깨닫게!”

 

순간 얼마나 당황스러웠던지...

북쪽이 사회주의 사회이므로 사회보장 문제에서 남쪽보다 제도적으로는 한참 앞서있다는 것을 누가 모르는가?

그러나 남쪽에서 온 내가 북 대학생들을 만나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남쪽에서 온 통일운동가로서 북의 최고학부 학생들을 만나면 묻고 싶은 것도 많고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은데,

그 많은 이야기를 다 놔두고 ‘남조선, 이렇게 불쌍하게 살아요, 학생들이 부러워요’ 하라고?

 

아니, 그런 맥락이 아니다.

나는 남쪽의 대학생들이 그 어려운 조건에서도 얼마나 씩씩하게 공부하는가를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아르바이트 하랴, 취업 걱정 하랴, 무지무지 힘들지만

남쪽 우리 학생들, 그래도 그 애들이 남한 사회의 미래이지 않은가?

그걸 잘 알고 있는 우리 학생들, 힘을 실어주지는 못할 망정,

북쪽 학생들을 앞에 놓고 불쌍한 아이들을 만들어 버릴수는 없다.

 

그러나 내가 정작 당황했던 것은

내가 북쪽 학생들과 만나서 그런 대화를 하는 게 적절한가 아닌가하는 따위의 논리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교수님에게 나는 한참 아래연배이지만

그래도 함께 마음을 나누는 벗으로 느껴주기를 바랬던 마음에 상처가 났던 것 같다.

함께 통일을 해나가야 하는 남과 북의 사람들이 분단을 넘어 어느 지점에서 만났고,

서로의 처지를 걱정하고 염려해주는 마음...

남이나 북이나 나름의 조건에서 자칫 삶에 찌들 수 있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애를 쓰며, 노력하는 마음을 나누는 대화들....

교수님에게도 그런 대화를 기대했던 것 같다.

 

갑자기 그 교수님이 그저 북쪽의 노인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남북 어디에나, 노인들이 요즘 젊은이들이 철이 없다고 걱정하는 것은 다 똑같다는 생각...

그래, 사실 나와 같은 여성도 아니고, 분단 60년 넘게 다른 체제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몇 시간 대화 끝에 어떻게 친구 같은 말들을 나눌 수 있겠나?

그런 것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겠지...

 

아직 남과 북의 사람들은 서로에게 관찰자일 수밖에 없나 보다.

아직은 남북협력사업이라는 지극히 좁은 의미의 일을 함께 하며,

소통하는 방식을 간신히 배우기 시작한 교류 초년병들이다.

 

평양에 자주 가다 보니 친정집 식구들보다 더 자주 만난 북 안내원 선생들,

그래서 몇 주일만 못 보면 근황이 궁금하고 협의해야 할 일들이 밀려 안타까운데,

그러나 막상 또 평양에 가면 사흘도 못되어서 빨리 서울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나의 삶의 터전 서울,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나와 같이 분단을 가슴으로 앓으며 함께 남북화해협력을 꿈꾸는 사람들이 그리워진다.

이것은 아마도 6.15공동선언의 시대, 남북교류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의 신종 분단병인 것 같다.

 

그래도 이건 긴 과정의 일부일 것 같다.

한 10년 쯤 더 지나면, 지금보다는 훨씬 더 서로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대화들이 가능하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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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합뉴스

 

 

지난 달(5월) 25일,

 북한 남포에서 한 농부가 타들어 가는 농작물을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사진입니다

 

황해북도 지역은 60년 만에, 평양지역은 105년 만의 최대 가뭄이라는데...

 최악의 가뭄사태 이후 더해질 식량난이 얼마만큼 규모가 될지 걱정이 됩니다.

올 하반기 대북 인도지원이 꼭 정상화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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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공연기간 중에 벌어진 가장 인상적인 사건이다.

 

북측의 남측 관광 담당 안내원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남측의 관광객이 양각도 호텔에 성경책을 뿌렸다는 것이다.

‘성경책?’ 그 두꺼운 성경책을 무슨 수로 뿌렸을까?[각주:1]

성경책을 뿌렸다고 저렇게 난리를 치나?

북측이 종교문제에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면

공포분위기가 조성되어 남측 관광객들의 거부감이 커질텐데 어찌해야 하나?

 

막상 문제의 ‘성경책’을 보니, 그건 성경책이 아니었다.

‘여호와의 증인’ 분들이 들고 다니는 <파수꾼> 형태의 얇은 소책자로 된 유인물이었다.

그런데 정작 심각한 것은 외관이 아니라 내용이었다.

포교를 빙자한 반체제 선전물... 굶주리는 북한 주민들을 한껏 동정하며

‘종교를 탄압하는 김정일 정권을 타도하고 자유의 남한 품에 안기라’는 반체제, 탈북 선동 유인물이었다.

그 어디에도 종교 본질의 복음과 사랑을 전파하는 아름다운 내용은 없었다.

 

직감적으로 이 유인물이 평양 시민들 손으로 가는 것은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북한 체제를 비판하는 것이 옳으니 그르니’ 등의 가치 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남쪽 관광객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서이다.

 

북한 정부와 주민들의 단결은 완전 견고하다.

자기 지도자를 욕하는 것을 참을 수 없는 모욕이라고 느끼는 평양시민들이 이 유인물을 본다면,

남쪽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돌변할 것 같다.

내가 만난 대부분의 평양 시민들은 ‘김정일 장군님’에 대한 신뢰와 존경에서는 한결같이 열렬한 편이다.

또 남쪽의 분들이 제기하는 다양한 문제의식에 대해서는 비교적 긍정적으로 바라보려는 시선을 갖고 있지만,

자신들의 체제를 비판하는 시선이나 말들은 설령 농담이라고 할지라도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그런데 이 정도의 유인물을 본다면 싸늘한 시선은 물론, 심하면 돌팔매를 해대지 않을까?

전체 남측 관광객을 보호하고, 모처럼 활발해지고 있는 남북 민간교류를 매끄럽게 확산시켜야 하는

남쪽의 민간교류 실무 책임자중 한사람으로서 갑자기 임무의 중요성에 등에 식은 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남쪽 분들에게 유인물을 돌리지 말라고 아무리 호소해도,

정작 이 유인물을 돌린 범인(?)은 순교하는 자세로 악착같이 유인물을 돌리고야 말 것인데,

어느 가방에 유인물이 들어있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손님들의 가방과 객실을 일일이 뒤져볼 수도 없는 일이다.

게다가 영문을 잘 모르는 일반 관광객들에게,

평양에 가니 포교활동을 억압하더라는 인상을 주어서도 안된다.

그러면서도 유인물 배포는 막아야 한다!!!

유인물이 돌고, 소동이 일어나면 아리랑 참관을 중심으로 한 평양 관광은 일시에 중단될 수 있다.

 

이 두가지를 동시에 해결하는 것! 정말 쉽지 않아 보였다.

할 수 없다. 방법은 오직 하나!

 

그날 평양에 들어온 모든 남쪽 관광객을 일일이 살펴보고 밀착 포위하여

더 이상 유인물 배포를 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

즉각 남쪽 관광객의 소속단체 등을 일일이 살펴보며,

그런 활동을 할 수 있는 개연성이 있는 사람들을 찾아내는 일에 착수했다.

조금이라도 의아하다 싶으면 남쪽에 그 관광객을 보낸 해당단체에 전화를 걸어 이것저것 묻기도하고,

그러다보니 한 두 사람으로 반경이 좁혀졌다.

 

우리 상황실 6명은 그 분들을 집중 포위하여 잘 보호하였고

평양을 떠나는 순간까지 더 이상 사고를 치지 않고 관광할 수 있도록 도와드렸다.

 

 

그림. 서영준 화백

 

 

사실 지금도 그분들이 유인물을 뿌린 범인(?) 이었는지 아닌지는 잘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더 이상의 유인물은 발견되지 않았고,

모든 남쪽 관광객들은 편안하게 관광을 즐길 수 있었다.

그리고 평양 시민들은 남쪽의 모든 관광객들이 북을 존중하고 남북화해협력을 열어가는

좋은 분들이라는 믿음을 손상 받지 않을 수 있었다.

이래서 남북관계는 더욱 발전되어 가는 것이지.....

 

남북화해협력을 주업으로 하는 직업이라니!! 정말 다양한 경험을 하는 군!

그날 들어온 남쪽 관광객을 무사히 서울로 돌려 보내드리고 나서,

우리는 우리 모습이 마치 영화에서 본 일급 안전요원 같다며 박장대소했다. ㅠㅠ !

 

 

 


  1. 참고로 북은 종교의 자유는 인정하나, 교회가 아닌 곳에서 적극적인 포교활동이 허용되는 나라는 아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서울 사람들은 역시 북한은 자유롭지 않은 곳이라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정은 남한도 마찬가지이다. 대한민국 헌법에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으면서도, 북한의 사상이나, 체제를 칭찬하면, 국가보안법으로 처벌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러니 결국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자신의 체제를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입장에 관용을 베푸는데 한계가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남한이 북의 주체사상에 민감하다면, 북에서는 남한 식 종교활동과 포교에 대해서 민감하다. 북한에서의 종교는 ‘체제와 대립하지 않으며 서로 보완적인 역할’을 하는 반면에, 남쪽에서 온 종교인들 중 일부는 ‘종교를 빙자해 북의 체제를 비난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북에도 종교의 자유가 있음을 역설하면서도, 무제한적 포교에 대하여서는 날을 세워 강하게 통제한다. 남한 사람들은 포교활동이 보장되지 않는 종교의 자유가 과연 제대로 된 자유인지 의아해햔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말릴 수는 없지만, 북에서 종교인이라는 이유로 탄압받는 사람은 없을 뿐만 아니라, 일요일 날 예배보러 교회를 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도 사실이고, 이런데도 종교의 자유가 없다는 주장은 너무 일면적인 생각이 아닐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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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만이 참가하는 대 집단체조 아리랑’ 공연이 진행되는 한 달 내내

평양 양각도 호텔은 남쪽 손님들로 시끌벅적 했다.

남과 북의 풍속과 생활습성이 달라,얼마나 많은 일들이 발생했는지....

 

그 중 하나가 욕실 사용 문제였다.

남쪽 손님들이 묵은 객실마다 욕실 바닥의 물이 넘쳐

침실 양탄자가 물에 흠뻑 젖는 일이 비일비재 발생하였고,

제때 갈아주지 못한 양탄자에서는 곰팡이 냄새가 풍겨났다.

 

사실 내가 처음 평양에 왔을 때도, 이런 실수를 했었다.

무심코 머리를 감고 나니 욕실 바닥이 온통 물바다가 되어 있었다.

평양 욕실에는 바닥에 배수구를 아예 설치하지 않은 탓이다.

물난리가 나고 나서야 배수구 문제를 알게 되었고

‘북한이 얼마나 돈이 없으면 배수구 시설조차 아껴야 했을까’ 싶어 내놓고 투덜거리지도 못하고

넘친 물을 수건으로 연신 빨아내어 가까스로 수해(?)를 막았었다.

 

그날 저녁 식사 때 그 이야기를 하자.

 

함께 왔던 신부님께서 평양만 그런 게 아니라, 유럽에도 욕실에 배수구가 없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유럽 사람들은 욕조 안에서만 물을 쓰는 것이 습성화 되어있어,

욕실 바닥에 배수구를 따로 설치할 필요가 없단다.

남한이 미국문화에 영향을 받은 것과 마찬가지로 북한은 러시아, 동구라파의 풍습에 영향을 받고 있다.

 

서울 목욕탕의 풍경이 생각났다.

우리 어머니는 뜨거운 물이 풍성한 동네 목욕탕에 가면

속옷 한 가지라도 더 빨아치우려고 아둥바둥했고,

더운 물을 팍팍 퍼부어 대면서 목욕비 투자 대비 만족도를 최대한 높이려고 하셨다.

우리네 욕실 풍습은 바닥에 편하게 앉아 때를 밀면서 물을 펑펑 부어내는 것이 아닐까?

점차 샤워부스나 욕조에서 간단하게 샤워를 하는 것으로 바뀌고 있지만,

욕실바닥에 배수구가 당연히 있는 조건에서 욕

조에 커튼을 안으로 드리우고 조심조심 샤워를 하는 일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림. 서영준 화백

 

하루 1000명 이상의 남한 손님들이 빚어내는 욕실 사고는

양각도 호텔 측으로서도 감당하기 어려운 대형 사고일 수밖에 없었다.

양각도 호텔 측의 빗발치는 항의가 우리 상황실로 쏟아져왔다.

남쪽 손님들이 모든 호텔 객실을 물바다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난감 난감... ㅠㅠ

 

남쪽 분들에게 욕실 바닥에 배수구가 없다고 조심하라고 하면,

사람들은 북한이 후지다고 투덜거릴 것이 뻔하다.

나름 비싼 돈을 내고 관광을 왔는데,

국제급 호텔이라고 해놓고 시설이 낙후되었다고 생각한다면 별로 기분 좋을 일이 아니다.

그 유쾌하지 않은 기분을 남쪽에 내려가서 입소문으로 풀면,

힘들게 마련된 평양관광의 붐에 차질을 빚을지도 모른다.

또 남쪽 사람들의 투덜거림을 북측에서 듣는다면 그 또한 기분이 좋을리 없다.

그러니 단순히 조심하라고 할 것이 아니라,

남쪽 사람들이 북한의 시설낙후문제로 바라보지 않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또 이런 문제를 아무리 사전교육 한다고 하더라도 몸에 밴 목욕 습성을 고칠 수는 없을 것 같아

방방마다 욕실 문 앞에 대문짝만하게 큰 글씨로 인쇄물을 써 부쳐야겠다고 생각했다.

 

 

양각도 호텔은 유럽식이라 욕실 바닥에 배수구가 없습니다.

욕조 안에서만 물을 사용해 주십시오

-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

 

 

 

 

 

 

라는 내용의 인쇄물을 만들어 상황실 직원 8명이 팔을 걷어 부치고 해결할 결심을 하였다.

호텔 프론트의 힘을 빌리지 않고,

층층이 청소하시는 아주머니들의 도움을 받아 방을 따고 들어가 인쇄물을 붙이는 방식이었다.

북측 도움 없이 상황실 직원들의 힘만으로

수 백 개의 방에 인쇄물을 붙이는 일을 조용히 해결한 우리의 열정에 스스로 감탄, 만족해하는 순간

갑자기 민화협 담당 선생이 달려오더니 목청을 높였다.

양각도 호텔 측에서 남측 상황실 일꾼들이 자기들의 동의도 없이 객실마다 헤집고 돌아다닌다고

항의가 들어왔다는데 ‘이경 선생이 이렇게 제멋대로 질서를 어지럽힐 줄 몰랐다’며,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아... 또 어떻게 설명하나?

양각도 호텔 측에 미리 양해를 구하지 못한 것을 설명하기가 좀 난감하다.

할수 없이 또 장황하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설명하자 점차 눈꼬리가 부드러워지더니

급기야 ‘정말 수고가 많다. 그렇게까지 사려 깊은데 놀랐다’는 치하(?)의 발언까지 해주며 돌아갔다.

 

아! 정말 평양에서의 모든 상황은 그 자체로 돌발 변수다,

물을 욕조 안에서 쓰는가 아닌가 같은 생각지도 못한 일들까지

한바탕 소동을 피워야 할 줄이야 차마 예상치 못했다.

 

인쇄물을 붙인 뒤로 욕실 바닥에 고인물이 침실로 범람하는 소동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인쇄물의 효용이 크다고 판단한 양각도 호텔 측에서는  그 인쇄물을 그 뒤로도 1년 이상 수거하지 않고 붙여 두었고,

덕분에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가 마치 양각도 호텔에 상설적으로 사무실을 두고 있는 듯한 착시효과가 있었다.

 

광고비 내지 않은 우리 단체의 홍보효과가 최고! 남과 북 민간의 갈등해결사 겨레하나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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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식사배달’은 남쪽 사회에서 일상적인 일이다. 자장면 신속배달 시스템은 아마도 세계 최고일지 모른다.

평양에서도 전화로 식사를 배달시켜 먹는 경우가 많을까? 그러면 금방 오나?

궁금할 수도 있는 문제였지만 그런지 안그런지 막상 접할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2006년 9월 말부터

<평양 문화유적 답사>와 <10만이 참여하는 대 집단체조 아리랑>공연 관람을 위한

남측 관광단의 대대적 초청사업이 한 달 이상 진행되었다.

하루 1000명이 넘는 남측 관광객들의 평양 관광 안내와 기타 여러 가지 업무지원을 위해

상황실이 설치되었고 나는 상황실장을 맡게 되었다.

아시아나와 대한항공의 점보급 비행기 3대가 하루 1000명씩을 쏟아내고

다시 그만큼을 싣고 가는 일들이 진행되는 동안, 양각도 호텔의 상황실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평양 상황실과 남쪽 겨레하나 사무실을 잇는 직통전화가 개통되어 수백 명의 참가자 명단을 팩스로 받고,

그에 대한 초청장을 북측 해당기관으로부터 받아서 남측 겨레하나에 보내주는 일이 매일 반복되었다.

또 비행기가 평양에 도착할 시간이면 순안공항에 마중을 나가고, 평양 관광에 앞서 기본 교육을 하고,

호텔 방을 배정하고, 북과 논의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안건을 정리하여 만남을 주선해주기도 하고...

분단이래 남쪽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북에 오는 것은 처음있는 일이었고, 그에 따른 사건사고가 연일 터졌다.

우리 상황실 직원 6명은 매일 초단위로 터지는 돌방상황에 대처하느라 이리저리 뛰어다녀야 했다.

그때 발생한 이른바 평양의 초 메머드급 사고는 다음 편부터 몇 번에 걸쳐 소개하기로 하고,

오늘은 일단 운반식사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겠다.

 

그림. 서영준 화백

 

아무튼 그때 너무 바빠서, 식당으로 내려가 밥을 먹을 형편이 못되었다.

서울에서 같으면 사무실 직원에게 ‘김밥 한 줄만 사다 달라’고 한다던가 했을텐데...

이런저런 궁리를 하면서 불현듯 신속배달 동네 중국집이 그리워졌다.

‘아 그렇지! 여긴 자장면은 아니어도 룸서비스는 될지도 몰라!!’하며

프런트로 전화를 걸어 룸서비스가 가능한지 물었다.

프런트 담당직원은 “아 운반식사요? 네 가능합니다. 인차(남측의 '금방'이라는 뜻) 가져다 드리겠습니다”고 하였다.

나는 이제 곧 식사가 오면 몇 숟갈 뜨고 빨리 나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주문한 시간이 5시 쯤이었는데, 인차는 무슨 인차!

30분이 지나고 1시간이 지나고 2시간이 다 되어가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다.

남쪽에서 우리가 흔히 배달시켜 먹는 짜장면은 좀 과장해 말하면,

전화를 끊기도 전에 벌써 음식이 도착한다고 하는데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을까?

깜박 잊어먹은 것이 아닐까? 설마...

재촉전화를 하지말고 믿고 기다려야지 하며 참고 참다가 나는 그날 결국 저녁식사를 포기하고 상황실을 나서야 했다.

급한 일들을 해결하고 밤 9시가 다 되어 올라오니 텅빈 상황실에 다 식어버린 식사가 덩그마니 놓여 있었다.

다음날도 하루 종일 잊고 있었다가 저녁 식사 무렵 다시 룸서비스를 빨리 가져다 달라며 신신당부를 하였는데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아! 더 이상은 못 참겠다.

나같이 중요한 단골(?) 고객의 입장을 이렇게 무시하다니!!! 정말 부화가 치밀었다.

‘5분 내로 도착하는 자장면’을 상상했는데, 양각도 호텔이 나같이 중요한 고객에게 불친절하다니!!!

(그때 양각도 호텔 측은 하루 1000명의 손님들을 전부 내가 초청해 오는 줄 알고 있었으니,

사실 따지고 보면 나는 정말 중요한 VIP 중에 VIP 아니겠는가? )

사흘째 되던 날은 더 이상 프런트에 전화하지 않고, 식당으로 달려갔다.

 

얼굴이 낯이 익은 접대원 동무에게 격렬하게 따지고 싶은 마음은 강렬하였지만,

그래도 나름 침착하고 우아한 모습으로 ‘운반식사가 늦어져 저녁을 계속 굶었는데 왜 이렇게 늦어지는지,

좀 신경 써서 가져다 줄 수는 없는지,

근데 그러기 위해서는 프런트가 아닌 식당의 책임자 누구한테 이야기하면 되는지’를 나름 점잖게 물었다.

나는 그렇게 차분하게 물어보면, 그 접대원동지가 깜짝 놀라고 많이 미안해하며,

“내일부터는 주문 즉시 바로 가져다 드리겠다”고 답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북쪽의 접대원들은 무척 친절하므로, 식사 운반이 늦어져 고객이 밥을 굶었다니 얼마나 미안해할까?

저 예쁜 접대원 동무가 쩔쩔매며 이야기하면

 나는 가볍게 미소를 띄며 내일부터는 신경써 달라고 여유있게 이야기해야지...

그런데 그 접대원 동무의 반응은 완전 달랐다. 완전!!!

 

  그림. 서영준 화백

 

너무 별일 아니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 식사가 늦어서 문제이십니까? 그러시다면 몇 시까지 가져다 달라고 주문해주시면,

딱 그 시간에 식사가 갈 것입니다. 내일은 몇시까지 갖다 주면 됩니까?”

이 얼마나 황당한 시츄에이션인가!

운반 시간까지 예약주문하면, 일없을 거라는 반응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돌방상황이었다.

단단히 마음잡고 따지러 간 나만 뻘쭘해지고....

톡톡튈 만큼 상큼한 모습으로 이야기하는 접대원동지를 보며,

방금까지 내가 무엇을 가지고 화를 참고 있었는지....

갑자기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묘한 처지가 되어 버렸다.

 

사실, 식사 운반시간을 미리 예약해 놓는 것은 의미가 없다.

연일 예상치 못한 사고가 빵빵 터지는 조건에서 언제 어디로 달려가야 할지,

언제 짬을 내어 급하게 밥을 시킬 수 있을지 모르는데 식사 운반시간을 예약하다니???

이건 해결 방법이 아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 갑자기 운반식사를 몇 시까지 가져다 달라는 뜻이 아니었다고 한다면 저 접대원 동무는 뭐라 할까?

북의 시스템이 원래 그렇게 되어있는 것 같은데 갑자기 전화해놓고,

‘빨리 빨리’를 외친들 그게 실현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 같았다.

또 이제와서 운반식사를 안하겠다고 하면 더 이상할 것 같아

별 수 없이 “날마다 6시로 해 달라 ”고 하는 정도로

시간 예약주문으로 입장을 말해놓고 돌아서면서 나는 금새 후회하기 시작했다.

‘저녁을 굶어야 하기는 마찬가지일 것 같은데, 괜히 저녁식사 값만 계속 나가겠군’,

‘그냥 빵이나 몇 개 사다 놓을 걸’ 하면서....

 

그 뒤로 더욱 곤혹스러운 사태가 발생했다.

날마다 6시면 거의 1분도 틀리지 않고 상황실로 운반식사가 날라져 왔고,

그 시간에 맞춰 밥을 먹을 형편이 되지 못했던 나는

주구장창 밥이 식어서 도로 내어놓는 일이 10일 이상 지속되었다.

이를 취소하자면, 또 누구한테 어떻게 이야기하면 되나?

 

그림. 서영준 화백

 

평양에서는 룸서비스, 식사배달 같은 일들이 일반화되어 있지 않고,

그러다보니 당연히 시스템화되어 있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운반식사’가 불가능 한 것은 아니므로

갑자기 손님이 프런트에 주문을 하면, 프런트에서는 식당에 연락을 하고,

식당 접대원들은 다시 지배인에게 이 문제를 보고하여 음식을 제작할지 말아야 할지,

결제를 기다려야 하니, 두 시간 이상 걸리는 것은 당연하다.

실제 운반식사로 배달되어온 쟁반의 내용을 보니, 운반식사용으로 따로 제작된 것 같았다.

 

그런데 이런 남과 북의 차이를 모르거나 체질화 되어 있지 않은 남쪽 방문객들에게

북의 운반식사는 정말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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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이번에는 남북 협력 사업에 대한 협의 중에서 발생했던 에피소드를 소개하겠다.

남과 북의 시각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경험이라 글을 읽는 분들이 재미있어 할 것 같다.

 

2005년 7월부터 몇차례에 걸쳐 있었던 '한국 관광공사'의 실무협의였다.

'관광공사'는 공사 주도의 북한관광을 성사시켜, 한반도 전체의 관광벨트화를 실현하려는 계획이 있었다.

금강산이나 백두산 관광 등 북한의 관광문제는 모두 현대아산에게 밀렸던 터라,

특히 평양 관광 만큼은 관광공사 주도로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나름 절박했던 것 같다.

 

관광공사의 입장은 도로안내판 재설치나, 기타 북이 원하는 평양 리모델링을 도와주고,

관광공사의 이름으로 시범관광부터 해보자는 계산이었다.

 

개성에서 두 세번의 실무 접촉 끝에 북에 적정량의 페인트를 지원하고,

전세 비행기 한 대 정도의 대표단이 평양, 묘향산을 방문하는 것으로 대강의 윤곽이 그려졌다.

논의가 비교적 빨리 마무리 되어 합의서에 양쪽이 모두 싸인 만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 순간 예상치 못한 복병이 나타났다.

 

관광공사는 '평양 리모델링용 페인트를 지원하고 시범 관광을 한다'는 내용이 명시된 합의서의 남측 초안을 제출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북이 “관광에 합의한다는 내용은 명시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전혀 뜻하지 않은 돌발 상황이었다. 이제까지 논의 된 사항이 아닌가?

 

관광공사는 ‘평양 시범관광용’이라는 명분으로 살림집(아파트) 외벽용 페인트를 지원할 수 있다고 누차 이야기했고,

북도 관광공사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고 논의를 진행시켜 왔지 않은가 말이다.

그런데 북은 관광공사의 상황을 이해한다는 것과, 합의서에 '관광'이라는 말을 명시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주장하였다.

 

그 이유인즉,

북은 남쪽 국민들에게 '평양 관광사업을 허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국가적 시책이 정리되어 있지 않은 조건에서

마치 관광공사와 그에 대한 논의가 있었던 듯 '관광'이라는 표현을 쓸 수는 없다고 하였다.

 

평양에 올수는 있으나

페인트를 지원해준 것에 대하여 답례로 오는 것이지

일반 관광객들에게 관광시켜주는 것은 아니란다.

 

관광공사는 난감해 하였다.

북에 페인트를 지원할 수 있는 명분은 시범관광을 하기위한 것인데,

그 명분을 합의문에 명시할 수 없다면 기금 마련도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저런 속사정을 털어놓으며 장기적 관광합의가 아닌 일회성이라는 점,

그저 명분용 문구일 뿐이라고 사정도 하고,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그러나 시종일관 대꾸도 없이 묵묵부답으로 앉아 있는 북!

적어도 30분 이상 그렇게 앉아 있었을까?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내가 '관광'이라는 표현을 '참관'이라고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더니

북은 표정이 단박에 환해지면서 동의한 반면,

이번에는 관광공사 측에서 '참관'이라는 뜻은 동의하나 합의서에 명시할수 없는 표현이라고 '불가'를 주장하였다.

 

다시 침묵의 시간....

 

나는 처음에는 북이 유연성이 부족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조금 더 생각해보니, 이를 단지 유연성의 문제로만 보는 것은 너무 가벼운 판단인 듯 싶었다.

'관광'이라는 문구에 그토록 예민할 수밖에 없는 북의 입장이 나름 이해되었다.

 

'페인트를 지원하고, 평양에 가는 것'의 의미는 정확히 보면 순수한 인도지원이라기 보다는

‘관광을 위한 선 투자 개념’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었고,

북은 그 당시의 시점에서 관광공사 방문이 관광개방으로 비추어 지는 것을 극도로 경계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던 것 같다.

 

'북이 얼마간에 페인트를 받고 관광공사의 평양 관광이라는 시장개방정책에 합의해준다? '

<개혁, 개방>이라는 자본주의적 시장개방 정책과도 잇닿아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서로의 입장이 이해가 되니, 단지 유연성의 문제로 보고 합의를 유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들었다.

 

관광공사는 결국 북에 페인트 지원을 했고,

얼마 후 2005년 10월 22일부터 25일까지 133명의 대표단이 북의 융숭한 대접과 안내를 받으며 평양을 참관(관광)할수 있게 되었다.

 

합의문은 어떻게 작성되었느냐고? 그것은 여기에서 공개하지 않겠다.

나는 남과 북의 엄청나게 예민한 차이를 넘나들며 협력사업을 해야 하는 협력사업자니까!

 

 

그림. 서영준 화백

   

다만 여기서 정작 내가 정말 아이러니 하게 느껴지는 장면을 한가지 더 이야기해야겠다.

 

돈을 들고 북을 지원하겠다는 관광공사는

북을 달래기도 하고, 호소하기도 하고, 어떻게 하든 합의서를 작성하려 땀을 뻘뻘 흘리는데,

북은 '관광불가'를 선언한뒤, 남측을 설득하려고 애쓰지 않으면서 침묵을 지키고 앉아 있는 장면에 대해서 이다.

이런 모습을 보면, 북의 태도가 고압적이라고 느낄 수 있다.

 

세상에!

돈을 들고 있는 쪽에서 지원을 해주겠다고 이렇게 저자세일수 있을까?

 

그러나 진실은 이런 것이었다.

북은 인도적 지원사업자인 내게도 늘 이렇게 이야기한다.

 

'동족의 어려움에 대하여 함께 해주겠다는 순수한 마음을 우리는 고마워합니다.

겨레하나는 댓가성이 아닌 순수한 지원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북남협력사업은 민족의 미래를 걱정하는 통일애국사업입니다.

댓가성 거래가 아닌 통일애국사업을 해주시는 분들에게 우리가 할수 있는 예우는 다 할 작정입니다.'

 

그러니까 북은 관광공사가 '명분'을 주장하는 속사정은 이해하나,

어떻게 하든 이 사업이 통일애국사업으로 정리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며,

시범관광을 위한 댓가성 지원은 용납할 수 없어 관광공사의 입장이 정리될 때 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이를테면, '당신들은 순수한 통일애국사업을 원하는가, 아니면 거래를 원하는가?' 이 질문을 해 놓고는

관광공사의 답을 기다리는 것이다.

 

아무튼 자본주의적 시각에서 보기에 이상한 현상이다.

북을 지원해주겠다는 남측에서 북에 이것 저것을 합의해 달라며 아우성을 치거나 화를 내고,

정작 도움을 바라는 북은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고....

 

북이 너무한가? 아니면 남이 경박한가? 그 판단은 독자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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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 북의 '고난의 행군' 과연 나에겐 어떤 의미였던가?

 

북의 ‘고난의 행군’[각주:1] 은 90년대 중반부터 불어닥친 북한의 위기상황을 극복한 방식에 대한 이야기이다.

 

3년간 연속된 대 홍수로 온 나라가 물에 잠기는 등 유래없는 재앙이 몰아닥쳤다.

또 갑작스런 동구 사회주의권의 몰락으로 구상무역[각주:2] 이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북한 경제는 근본적으로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국제무역 결제 방식이 바뀌어 석유와 식량을 수입할 달러를 구할 수 없어,

아사자가 속출하고, 기차와 자동차는 멈추었다.

물에 잠긴 광산에서는 더 이상 석탄을 캘 수 없었고,

기름과 원자재 없는 공장은 줄줄이 문들 닫을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북의 최고 지도자 김일성 주석의 사망까지 덮쳐,

북한은 아마도, 3일내, 혹은 3주일 내, 그것도 아니면 3개월 내 망할 것이라는 소문이

국제사회에 파다할 정도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자신들의 체제에 순응 편입하기를 거부하는 북한을

경제적으로 더욱 봉쇄하고, 압박하는 전술을 구사하였다.[각주:3]

당시 상황은 러시아도 중국도 미국에 맞서 북과 공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공장도 멎고, 전기도 끊어지고, 먹을 식량은 없는 나라!

그런 나라가 생존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90년대 중후반 그것이 북한의 실제 모습이었다.

 

조국의 절반이 이렇듯 처참한 지경임에도 불구하고,

남한에 사는 우리들에게 이 재앙은 함께 극복해야할 뼈아픈 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저 '동토의 땅, 북한! 2대째 내려오는 그 독재자의 나라에 가엾은 주민들만 굶어 죽네'라는 느낌이었다.

먼 아프리카 어느 오지의 가난을 바라보는 같은 것이 객관적인 평가였을까?

아니 그보다는 더 냉소적으로, ‘강 건너 불구경’하는 분위기였다는 것이 정직한 이야기이다.

백만 아사설이 심심치 않게 언론에 회자되면서

97년 나는 잠시 북한 동포돕기운동에 아들 아이의 돌반지를 팔아 성금을 낸 적이 있지만,

그때만 해도, 북의 가난의 실체에 대해서 구체적 표상으로 다가오지는 않았었다.

 

 

그림. 서영준 화백

 

아마도 반공반북 교육으로 머릿속에 철저히 무장된

분단의 다른 한쪽 대한민국의 국민들에게는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북한은 한 핏줄도 이웃도 아니며, 그저 관념 속에 존재하는 이상한 동네,

또 그런 이상한 동네가 과연 실제 하는지 실감조차 할 수 없는 거대한 감옥같은 이미지일 뿐이었다.

 

그러나 북한의 재앙에 대하여 아무런 표상을 갖지 못했던 진짜 이유는 분단으로 인한 이유만이 아니었다.

대한민국에서 살아온 나에게 수해나, 빈곤의 문제가 아무리 심각해도,

그것은 일부 지역, 일부 계층의 문제였지, 전 국가적 문제인 적은 한번도 없었고,

'나'와 '우리' 에게 당장 닥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다.

고도로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 대한민국에서 ‘빈곤의 문제란

국가적 문제가 아닌 일부 저소득층의 문제’일 수밖에 없었고,

자연재해란 일부 시골에만 해당되는 지극히 예외적인 우발사태에 불과한 문제라는 뜻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국가적 빈곤’이라는 말 대신에 ‘국가부도 사태’라는 말이 심심찮게 회자된다.

국가부도 사태를 예감하게 되면 온갖 것을 내주고라도 외자를 끌어들이고,

외자의 요구에 의해 국가적 구조조정에 들어가게 되면 계층 간의 갈등이 엄청나게 증폭되고,

마치 나라 전체가 외국자본이라는 전당포에 명줄을 저당 잡힌 꼴이 되어도 별수 없이 항복 선언을 한다.

 

또 항복 선언을 할지언정, 그 나라의 브랜드 가치, 외양적 화려함을 포기해서도 안된다.

그 모든 것이 ‘자본을 끌어올 수 있는 중요한 담보’이므로 그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속이 곪아도 겉은 화려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악순환?

국가적 경제위기인 국가부도, 그에 대한 자본주의 국제사회가 대처하는 모습의 정석이다.

 

그런데 2001년 내가 본 평양의 남루한 모습, 숨기지 않은 국가적 빈곤!

그것은 그전에 내가 한번도 상상해보지 않은 희한한 풍경이었고 설명하기 힘든 충격이었다.

 

북한은 정말 자본주의식의 선택을 하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하지 않은 것일까?

또 북한은 자본주의식의 선택 대신 과연 무엇을 선택했나?

정권 유지인가? 아니면 북한의 말대로 국가적 자주권인가?

 

이후 북한을 드나든 10년간 늘 느껴야 하는 원초적인 질문이다.

평양은 나에게 그렇게 조용한 충격으로 ‘사회주의 자주국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위용을 드러냈다.

 

 

 


  1. 1990년대 중ㆍ후반 국제적 고립과 자연재해로 수백만 명의 아사자가 발생하는 등 북한이 경제적으로 극도의 어려움을 겪은 시기에 제시된 구호를 말한다. 원래 고난의 행군이란 말은 1938년 말∼1939년 김일성 주석이 이끄는 항일빨치산이 만주에서 혹한과 굶주림을 겪으며 일본군의 토벌작전을 피해 100여 일간 행군한 데서 유래했다 [본문으로]
  2. 일정 기간 동안의 수출과 수입이 균형을 이루도록 두 나라가 협정하여 차액 결제를 위한 별도의 자금 지불을 필요로 하지 않는 무역 제도 [본문으로]
  3. 베트남 전쟁 당시 북한은 베트남에 전투비행사를 보내 미군 전투기를 수없이 떨구어주었으며 부상당한 많은 베트남 병사들을 평양 병원에 옮겨 극진히 치료해주었다. 고난의 행군 시절 북한은 그 베트남에게 쌀 지원을 요청했지만 베트남 당국자들에게 외면 당했다. 베트남 정부는 몇 줌 안 되는 쌀을 주면서 ‘미국이 북한에 식량지원하는 것을 반대하기 때문에 지원할 수 없다며 이해해달라’고 애청하였다고 한다. 이북의 외교관은 분노의 음성으로 그 쌀을 하노이에 있는 거지들에게나 주라고 하면서 그냥 돌아갔다고 한다. 이것만 보더라도 러시아 패망이후 미국이 철저히 북한을 봉쇄한 것이 얼마나 잔인했는지 잘 알 수 있다. 북은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출처] 브루스 커밍스가 바라본 북한(1)-70년대에는 북한이 더 잘 살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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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마주친 북한 가난의 실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그 생생한 충격

 

2001년 8월 1일부터 3일까지 북과의 사업협의를 위해 처음 평양을 방문했다.

평양에 대한 구체적 기억이 아직까지 남아있지는 않다.

기껏해야 ‘북한이 사상의 고향이라고 자랑하는 평양이라면,

사회주의의 위용을 한껏 드러낼 수 있도록 건설되어 있지 않을까?

서울처럼 화려하고, 정신없는 대신 그래도 조용하고 차분한 거리 풍경’ 을 기대했던 것 같다.

 

그러나 막상 내가 본 평양은 썰렁했다.

 

8.15 축전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라면 시기적으로 보아 도시 꽃단장의 손길이 한창이어야 할 터인데,

그 단계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낡은 건물 보수공사가 대부분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도로를 보수하거나, 낡은 건물을 보수하고 있는 장면조차

서울에서 흔히 보는 각종 대규모 현대식 기계 장비들은 없었다.

제대로 된 기계 장비 없이, 징이나 망치 하나 들고

벽에 매달려 뚜닥뚜닥 건물 보수를 하고 있는 군인들의 모습이 서울 변두리나 시골 장터 같았다.

 

타임머신을 타고 60년대 쯤으로 돌아온 걸까?

이미 오래전 발전을 멎어버린 도시에 온 걸까?

8월 초순이면, 풍요롭고 조금은 늘어질 정도로 여유있는 계절이었지만,

함께 간 우리모두 심란한 느낌들을 지울 수 없었다.

 

줄줄히 늘어서있는 고층 아파트들은

오래된 회백색의 칠 흔적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정도면 그래도 나은 편이었고,

대부분 건물 외벽이 페인트 칠없이 시멘트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외장재를 칠하지 않으면 건물 수명도 짧다는데....’

 

유리가 절대 부족한 듯 비닐로 창을 대충 막아 놓은 곳도 많았다.

평양의 중심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인도의 블럭들은 여기저기 깨진 체 방치되어 있었고, 버스들은 심각하게 낡은 편이었다.

 

 

그림. 서영준 화백

 

문득 초등학교 시절 부모님과 TV로 보던 북의 모습이 떠올랐다.

72년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던 무렵이었을 것이다.

남쪽 대표단이 탄 차량이 판문점을 통과해 북을 달리는 장면이었는데,

시골 들판에 스프링쿨러가 돌아갔고 있었다.

그때 아버지가 감탄했던 말씀이 기억에 남아있다.

 

"우리 시골에는 저런 거 없는데, 대단하네?"

 

그 스프링쿨러가 남쪽 취재단을 의식한 장식용이었는지,

아니면 그 당시의 북한 농촌의 진짜 수준이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북한이 많이 발전한 것 같다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셨다.

 

후에 철이 들면서부터 알게 된 사실은

70년대 혹은 80년대 중반까지는 적어도 북한의 경제가 남한보다 앞섰다는 점이다.[각주:1]

 

특히 평양은 사회주의의 위대성을 한껏 과시하기 위해 세계적으로 잘 건설된 도시라는데,

그 70년대의 위용은 다 어디로 갔을까?

 

'만수대 공원'이니, '의사당'이니, '김일성광장'이니, '인민대학습당'이니,

유명한 건물 들은 그 기본 골격이 웅장하고 멋있어, 태초의 품격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평양 거리 곳곳마다 느껴지는 가난의 모습,

수도 평양의 모습이 이 정도인데,

북한이 겪었을 고난의 행군이 실체가 무엇이었는지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1. 최초의 평양주재 스웨덴 외교사절인 에릭 코넬 대사는 1975년 북한에 도착했다. 때마침 경제를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수십억 달러를 투자한 북한 당국의 자부심과 기술숭배를 목격할 수 있는 시기였다. 그 해 북한에는 서유럽과 일본에서 일체의 공정설비를 포함하여 상당한 양의 외제장비가 수입되었다. 북한은 최고의 병원에 최신식 지멘스 의료장비를 설치했고, .... 냉난방 시설이 갖추어진 거대한 고급 건물과 극장들을 갖추었다. 정밀한 중앙통제실에서 컴퓨터로 운용되는 냉난방 · 전기시설을 갖춘 대규모 쇼핑몰들도 들어섰다. 소비에트 블록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무역도 양상이 달라져, 1974년부터 79년 사이에는 비 공산권 국가들과의 거래가 동구권 수준으로 증가했다. 코넬은 북한이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거둔 성취에 찬사를 보냈다.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많은 주택단지를 건축했고, 모든 사람에게 무상교육과 무료진료를 실시했으며, 1970년대 남한보다 생활수준이 높고 고른 것이 인상적이었다. 당시 남한에서 보이던 광범위한 궁핍과 무주택자도 눈에 띄지 않았다. 민주사회주의 국가에서 온 대사로서는 당연히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출처] 브루스 커밍스가 바라본 북한(1)-70년대에는 북한이 더 잘 살았다. (229-230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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