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종합대학 생명공학부에 항생제 소공장 건립을 지원할 때의 이야기이다.

 

남쪽에서 함께 간 기술자들이 공장설비 설치에 몰두해 있는 동안

나는 생명과학부 학장님과 사무실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학장님은 인정많고 따뜻한 이웃집 어르신 같은 인상을 주시는 분이었다.

그 분은 남쪽 통일운동가의 삶에 대하여 많이 궁금해 하셨다.

통일운동을 하면 감옥에 간다는데 6.15공동선언 이후에도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통일운동단체 일을 하면 생활은 어떻게 해결하는지, 두런두런 물으시면서 우리들의 삶에 대해 딱해 하셨다.

자기 삶을 챙기랴 통일운동하랴 얼마나 힘드냐며,

사무실에 있던 접대용 빵 한쪽이라도 더 먹어보라고 집어 주실 때는

정말 훈훈한 시골 할아버지 같아 감동이 밀려오기도 했다.

 

잠깐, 그 정도의 일에 감동해하느냐는 분들을 위해 잠시 설명을 해두어야겠다.

남쪽에서는 통일운동을 한다고 하면, 좀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는다.

남북관계가 열린 이후로 나아지긴 했지만,

시민단체 중에서도 별반 인기 없는 곳이 평화통일 분야이고,

인도지원단체 실무자들은 ‘퍼주기논쟁’으로 머리 뒷꼭지가 따갑기 마련이다.

그래서 북쪽에서 우리들을 통일애국운동을 하는 분들이라고 환대해 줄때마다,

북쪽이 마치 친정집처럼 느껴지며 대북 지원 기금을 마련하느라 쌓인 피로가 일시에 확 풀리곤 한다.

북쪽 분들이 이렇게 따뜻하며 정이 많다는 것을 느낄 때 마다,

‘민족의 동질성’ 같은 케케묵은 단어(?)들이 심장을 뛰게하는 신성한 열정으로 다시 살아나,

남북의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자유롭게 만나 흉허물없이 묵은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날을 기다리게 한다.

 

교수님께서 우리 아이가 몇 살인지를 물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지금 고등학생이고, 대학에 가면 학비 걱정이 태산인데,

등록금만 한해 1000만원이 넘는다’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위로를 기대하고 약간의 어리광을 섞어서 말이다.

 

그때 나는 교수님께서 부모노릇 하랴 통일운동하랴 정말 애쓴다며,

손이라도 잡아주실 줄 예상했던 것 같다.

이 어른이 얼마나 나를 딱해 하실까?

그런데 반응이 너무 뜻밖이다.

 

그림. 서영준 화백

 

애잔한 눈빛이 아닌 갑자기 장난기라도 발동한 듯, ‘웬 쾌재냐는 듯’ 생기어린 눈빛...

교수님께서는 갑자기 학생들을 몇 명이라도 불러와야겠다며, 금방이라도 자리를 일어나실 분위기다.

 

“요즘 우리학교 대학생들이 너무 철이 없어요.

자기들 학비를 국가에서 전액 부담하는 것이 고마운 줄 도통 모르거든!

등록금만 무료인 것이 아니야!

기숙사에서 무료로 재워주고, 교복도 나오고, 용돈까지 주거든?

근데 우리 학생들은 그게 얼마나 큰 혜택인지 모르고 당연시 여긴단 말야.

이 아이들한테 이경 총장 선생이

남조선 대학생들에 비해 자기들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설명을 좀 해주오,

국가의 고마움을 깨닫게!”

 

순간 얼마나 당황스러웠던지...

북쪽이 사회주의 사회이므로 사회보장 문제에서 남쪽보다 제도적으로는 한참 앞서있다는 것을 누가 모르는가?

그러나 남쪽에서 온 내가 북 대학생들을 만나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남쪽에서 온 통일운동가로서 북의 최고학부 학생들을 만나면 묻고 싶은 것도 많고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은데,

그 많은 이야기를 다 놔두고 ‘남조선, 이렇게 불쌍하게 살아요, 학생들이 부러워요’ 하라고?

 

아니, 그런 맥락이 아니다.

나는 남쪽의 대학생들이 그 어려운 조건에서도 얼마나 씩씩하게 공부하는가를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아르바이트 하랴, 취업 걱정 하랴, 무지무지 힘들지만

남쪽 우리 학생들, 그래도 그 애들이 남한 사회의 미래이지 않은가?

그걸 잘 알고 있는 우리 학생들, 힘을 실어주지는 못할 망정,

북쪽 학생들을 앞에 놓고 불쌍한 아이들을 만들어 버릴수는 없다.

 

그러나 내가 정작 당황했던 것은

내가 북쪽 학생들과 만나서 그런 대화를 하는 게 적절한가 아닌가하는 따위의 논리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교수님에게 나는 한참 아래연배이지만

그래도 함께 마음을 나누는 벗으로 느껴주기를 바랬던 마음에 상처가 났던 것 같다.

함께 통일을 해나가야 하는 남과 북의 사람들이 분단을 넘어 어느 지점에서 만났고,

서로의 처지를 걱정하고 염려해주는 마음...

남이나 북이나 나름의 조건에서 자칫 삶에 찌들 수 있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애를 쓰며, 노력하는 마음을 나누는 대화들....

교수님에게도 그런 대화를 기대했던 것 같다.

 

갑자기 그 교수님이 그저 북쪽의 노인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남북 어디에나, 노인들이 요즘 젊은이들이 철이 없다고 걱정하는 것은 다 똑같다는 생각...

그래, 사실 나와 같은 여성도 아니고, 분단 60년 넘게 다른 체제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몇 시간 대화 끝에 어떻게 친구 같은 말들을 나눌 수 있겠나?

그런 것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겠지...

 

아직 남과 북의 사람들은 서로에게 관찰자일 수밖에 없나 보다.

아직은 남북협력사업이라는 지극히 좁은 의미의 일을 함께 하며,

소통하는 방식을 간신히 배우기 시작한 교류 초년병들이다.

 

평양에 자주 가다 보니 친정집 식구들보다 더 자주 만난 북 안내원 선생들,

그래서 몇 주일만 못 보면 근황이 궁금하고 협의해야 할 일들이 밀려 안타까운데,

그러나 막상 또 평양에 가면 사흘도 못되어서 빨리 서울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나의 삶의 터전 서울,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나와 같이 분단을 가슴으로 앓으며 함께 남북화해협력을 꿈꾸는 사람들이 그리워진다.

이것은 아마도 6.15공동선언의 시대, 남북교류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의 신종 분단병인 것 같다.

 

그래도 이건 긴 과정의 일부일 것 같다.

한 10년 쯤 더 지나면, 지금보다는 훨씬 더 서로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대화들이 가능하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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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

 

2004년 17대 총선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으로 한나라당이 역풍을 맞으며 열린우리당이 과반 의석을 차지하고 민주노동당이 제3당의 지위에 오르며 마무리되었다. 술렁이던 당시의 분위기는 다소 과장되게 표현하면 절차적 민주주의 차원에서 ‘역사의 종언’에 가까웠다. 돌아보면 역사의 종언은커녕 가파른 내리막길이 시작되는 야트막한 고지였을 뿐이지만, 그때는 그렇게 판단할 만한 경험적 한계와 맥락에 놓여 있었다.

 

《민족21》은 2004년 17대 총선 직전에 평화․통일 후보를 선정해 발표했다. 지면의 많은 부분을 할당한 특집 기사였고 총 30명의 후보를 선정했다. 과연 누가 올바른 관점과 실천력으로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기여할 것인가. 지금이야 굴곡의 세월을 거치며 옥석이 많이 가려졌다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못했다. 《민족21》기사가 국내외에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되었다는 후문이다.

 

암울했던 2008년은 건너뛰고 《민족21》은 지난 4.11총선을 앞두고 다시 평화․통일 후보를 선정했다. 그런데 기술적인 어려움이 많았다. 예비후보가 넘쳐나고 각 정당의 공천과 야권단일화가 늦어졌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3월호에는 서울지역 예비후보로 한정해 선정할 수밖에 없었다. 4월호에는 전국단위 야권 단일후보 중에서 30명 가까이 선정했다. 전체 합쳐 50여명이니 산만한 면이 없지 않다. 하지만 누구는 빼고 누구는 넣고 하는 기준을 세우기가 곤란했다. 남북관계가 꽉 막혀 있던 탓에 누구도 구체적인 성과물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거의 행적과 성향, 입장 표명이나 발언 등이 선정의 기준이 됐다.

 

***

 

안타깝게도 평화․통일 후보들의 당선율은 극히 낮았다.(대략 10% 조금 넘는다.) 사무실에서는 평화․통일 후보 선정이 일종의 ‘저주’가 된 것이 아니냐는 농담이 오고갔다. 웃자고 한 농담치고는 뒷맛이 텁텁한 농담이었다. 두 달에 걸쳐 평화․통일 후보 선정 때문에 골머리를 썩었는데 결과라도 좋아야 할 것 아니야!!

 

 

19대 국회의원 당선자 중 '가장 평화.통일에 기여할 만한 당선자'로 꼽히는 홍익표 당선자.(사진출처. 홍익표 당선자 블로그)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평화․통일에 기여할 만한 당선자’는 평화․통일 후보에 선정되지 않은 사람 중에서 나왔다. 서울 성동구을의 홍익표 당선자였다. 민주통합당 임종석 전 사무총장이 후보직을 사퇴하면서 뒤늦게 선거에 뛰어든 홍익표 당선자는 선거운동 20일 만에 본인의 표현대로 말하자면 기적과도 같은 승리를 이루었다. 총선이 끝난 직후 선거운동 사무실에서 홍익표 당선자를 인터뷰했다. 기적과도 같은 선거 승리는 기쁘지만 앞날에 대한 걱정도 컸던 홍익표 당선자, 승리한 선거운동본부의 들뜬 분위기 속에서 짧은 인터뷰를 마치고 나왔다.

 

***

 

결론을 말하자면 이렇다. 19대 국회에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해 전력을 기울일 당선자는 소수다. 본선에서도 많이 떨어졌지만 본선 전에 이미 많이 걸러져 나갔다.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의 정책을 보면 한반도 평화․통일이 민생 다음으로 2순위라 할 만하다. 그런데 2순위에 걸맞게 지역구와 비례대표에 공천을 하고 역량을 배치한 것 같지는 않다.

 

 

 

 

왜 그럴까.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각 정당 내부의 사정도 있을 테고, MB정권 하에서 통일 분야 일꾼과 전문가들이 두각을 나타내기 어려웠던 상황 탓도 있겠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한반도 평화․통일 문제가 민생과 같은 ‘생활적 요구’ 반열에 오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한반도 평화․통일 문제는 여전히 ‘이념적 요구’ 수준에 묶여 있다. 이는 대북정책에 대해 입을 다물고 집요하게 민생을 내세웠던 새누리당이 총선에서 승리한 요인과도 관련이 있다. 각 정당들은 평화․통일 후보들을 많이 공천하고 당의 얼굴로 내세워야만 승리할 수 있다는 식의 여론의 압박을 받지 않았다. 민생과 한반도 평화․통일 문제가 분리된 것, 이것이 이번 총선을 지켜보며 느꼈던 아쉬움이다.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이런 생각도 든다. 민생의 핵심은 경제민주화일 텐데, 경제민주화에 대해 진정한 의지와 전문성을 지닌 당선자는 얼마나 될까. 민생을 말하면서 각 정당은(특히 새누리당은) 그러한 후보자를 몇 명이나 공천하고 내세웠나. MB심판과 민생 중 19대 총선에서 국민들이 선택한 화두는 민생이었다. MB심판을 목청껏 외치던 야권은 패배의 쓴 잔을 마셨다. 하지만 그 요란하던 민생도 립서비스로 끝날 공산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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